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는 "아빠 책상 뒤지기". 왠지 가끔 아빠 책상을 뒤지고 싶은 날이 있다. 아빠는 너무나 느리고, 당당해서, 마치 개인적인 비밀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은데다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장 먼저 눈물이 그렁그렁해짐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감상적인 말은 하지 않으니까, 가끔 뭔가 숨겨놓은 비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항상 아빠 책상을 뒤적거려보지만 실로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 사실 아빠조차도 잘 사용하지 않는 아빠 책상이니까. 내가 한 번 앉아서 들척거림으로서 먼지들만 제 자리를 잃을 뿐이다. 

우리 아버지 책상은 오빠가 중학교 때 쓰던 것을 (우리 오빠는 고등학교가 기숙학교였어서 고등학교때 저 책상은 그냥 장식용 가구 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치워버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서재에 옮겨놓은, 당시 폭풍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뱅가구" 책상이다. 아빠가 책상에 앉아 공부할 일은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빠는 너무나 외로움쟁이라서 방에 틀어박히는 일은 거의 없고 주로 거실에 상주하시거나 내 방이나 안 방에서 나랑 놀거나 엄마랑 노니까, 그 책상에는 주로 멀티탭들, 세금 고지서, 집문서 (-_-;), 여권 및 각종 서류들이 정리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런, 아주 재미없는 것들에 묻혀 모르던 것들이 가끔 눈에 띌 때가 있는 거라. 오늘은 쌓여있는 증명사진들, 그러니까 정사각형 7바이 7 봉투에 들어있어, 쓰고 남은 증명 사진들 봉투들이 한무더기 쌓여 있길래 꺼내봤다.
처음은 당연 아버지가 최근에 여권사진 찍으신거,그 다음은 당연 어머니가 여권사진 찍으신거 (두분이 같이 가서 발급 받으셨고 언제나 서류챙기기는 아빠 몫이니까)
그리고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리고 그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리고 그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그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렇게 엄마가 20대에, 처음 결혼해서 여권사진 찍으신거 까지 가지고 계시더라. 흑백 사진속에 엄마는 정말 70년대 같은 스웨터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 너무 앳된, 지금 나보다 더 어린 모습이었다.

뭔가, 너무 감격스럽고도 비밀스런 장면이라 나는 얼른 그 사진들을 착착 넣어서 고 자리에 그대로 모셔놨다. 그리고 1시간쯤 있다가 엄마가 성당에서 돌아오신 걸 보고 나는 참지 못하고 쪼로록 달려나가, 모년의 은밀한 식사시간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평소처럼 깔깔깔 웃지 않고, 엄청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한참 사진을 쳐다보다 얼굴을 붉히며 말하신다.
"이게 언제더라…"

아무래도 우리 아빠처럼 다정다감하고 아기자기한 남자면 좋겠는데, 결국에는 수많은 내 친구들이 주장하듯, 나는 father 컴플렉스를 뛰어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는 녀자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미 나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아빠 같이, "자상하고 잘생기고 똑똑한"(우리 엄마가 언제나 나에게 자랑하는 수식어, "내남편처럼 잘생기고 똑똑하고 자상한 남자는 없다.") 남자는 없다는 것. 그리고 아빠도 젊었을 때는 전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아빠는 7년만에 생긴 아기인 우리 오빠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회가 먹고 싶다니까 만원짜리를 주며 "사다먹어"라고 말해서 33년뒤인 오늘날까지 구박당하고 있고, 9년만에 생긴 아이인 내가 태어날 때에는 스위스에 가는 바람에 엄마 곁에 없어서 31년뒤인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분노폭발 직전까지 가신다. 이 두 이야기야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농담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아.. 그 이상은 ㅠㅠ.. 어쨌든 그는 대약자.)

이야기로 쓰면 마치 너무나 완벽한 남편같지만, 우리집은 실로 엉망인 집안이고, 부모님이 아침마다 툭탁 거리는 소리로 나는 잠에서 깨서 "이제 그만 싸우자." 라고 말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아름다운 이야기'가 써지는 것은, 결국 별것 아니게 평범한 우리 세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있고, 아주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모든 것을 글로 남기고 싶은데, 그 것은 내 미술적 재능이나 음악적 재능이 "기록"의 수준에 이르기에는 너무 미천해서 일 뿐이다. 조상님이 "글"이라는 걸 발명해줘서 감사할 따름.

그러니까, 문득 나도 계획적인 글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보고 싶어서 한 번 써봤다. 블로그에 또 거미줄 치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일은 아빠 책상 뒤지기가 아니라, 글로 남기기라고 덧붙이고 싶다. 당신들이 보지 않는다면 당신들에 대한 글도 쓸 수 있는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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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