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2009. 11. 23. 07:01
"내 자신의 역사 기록 가운데,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쓰인 '19세 미만 관람불가' 부분을 읽는 기분이었다. 부분적인 거짓들과 이해할 수 없는 반쪽 진실의 단편들로 구성된, 절반은 베일에 가려진 인생 속에 갇힌 느낌이었다. 나는 매일 같이 보아온 그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속에 숨겨진 애매모호함과 비밀을 처음으로 밝혀내는데 나 또한 한몫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하마터면 그 사진 앞에 무릎 꿇을 뻔 했다. 그 흑백사진 속에서는 어머니가 수녀원의 일원이었다는 증거가 담겨 있었다.나는 그저 입을 다무는 것 만이 역사상의 최고의 거짓말을 지어낼 수 있다는 근본적인 생각의 복잡한 삼각법 문제를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 p155


사우스 브로드-팻콘로이(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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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2권.  원제는 South of Broad 인데 of는 왜 홀라당 팔아먹었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정말 우연히, 눈에 띄었기 때문, 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음. 500~600페이지에 가까운 거대한 두께의 책이 2권이나 있는 것을 보고 <읽고 싶다>고 생각한 느떄 심정을 전혀 모르겠으나, 어찌되었든 <나의 올해의 소설>안에 들어갈 것 같다.

"몇몇은 그가 그 유명한 풋사랑에서 헤어나기만 한다면 진지하게 교제해보고 싶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그는 아직도 그 어떤 남자와도 함께 할 수 없는 여자에게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자신을 조소했다. 하지만 그는 찰스턴 항구 조류에 갇힌 튜브에서 옷을 입은 채로 떠다니던 그 열일곱살 때와 정확히 똑같은 감정이 일지 않는 한 그 어떤 여자와도 결혼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는 사랑이 무엇인지,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 알 고 있었다."
-p 175 (이 소설에서 가장 달콤한 레오의 아버자의 연애이야기)


정말로 아름다운 이야기고, 누구나 공감할 만한 유년시절의 추억들과 운명의 소용돌이,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머무는 것보다 살아가는 것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를 한다. 요즘 생각하는 많은 주제들이 책에 묻어 있어서(선택/운명/영원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것/인간의 능력 밖의 것들/이야기의 가치 등등) 더 재미있게 보았다. <운명의 비정함>이라고 작가는 말하지만 책장을 덮은 나로서는 엄청 행복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우리를 한데 묶었던 힘은 우리를 갈래갈래 찢어놓기도 하고, 우정에 한희를 가져다 주는 미묘함과 무분별 그리고 한계를 가르쳐주기도 하였다. 나는 친구들 중 일부가 다른 사람들과 더는 서로 사랑할 수 없음을 알아챘고 그것은 대부분 맞았다. 이듬해 5월 우리는 멋있고 자기 실현적이며 놀랄만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졸업식장을 떠났다. 우리는 이제 막 들어가려는 세상에서 무언가를 바꾸어 놓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괜찮게 해냈다. 우정은 우리를 한동안 지탱했지만, 그 우정도 번쩍이는 광채를 다소 잃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인생의 중반기에 서로를 소리쳐 부르며 또 다시 찾게 되는데, 그렇게 된 계기는 노크소리 같이 지극히 단순한 것이었다.
p251



무엇보다 책을 읽어가면 정말 그 장면을 바로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작가의 묘사력에 감탄했다. (내가 가장 종하하는 부분은 주인공 레오가 신문 배달을 하면서 동네를 도는 것에 대한 묘사다. 훗날 동네 사람들은 그날의 레오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설명하는 부분) 글을 정말 "아름답게" 쓰는 능력을 지닌 작가인듯. 그리고 미국의 남부에 대한 애착과 남부 유머의 매력에 쏙 빠질 수 있는 책.

Posted by aeons
서재2009. 9. 16. 01:46

1. 그와 만난 후, 나의 몸은 정직하게 이 스트레스를 받아들여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글자와 글자를 눈으로 확인한후 그것이 단어임을 인식하고, 다시 단어와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이라는 것을 30초마다 한번씩 확인해가면서 바우돌리노를 읽었다. 하필이면 왜 그 상황에서 바우돌리노였어?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 상황에서는 무슨 책이든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을테니 결국 뭐였든 상관없었을꺼야.라고 대답했으리. 아무튼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인내심을 가지고 읽은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바우돌리노.

2. 움베르트 에코는 실은 소설은 단 4권을 썼는데-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을 안 읽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1등은 푸코의 진자. 미안하게도 바우돌리노에 대한 평가는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가 없겠지만, 일단은 꼴지.(그렇지만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친구는 자기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깔깔 거리면서 책장을 넘겼다고 증언했다)

3. 일단 바우돌리노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실제 중세 유럽에서 떠돌던 이야기들이나, 전해지던 이야기들. 그 모든 설화와 신화들이 뒤엉켜 탄생된 완전한 거짓 인간, 그러나 모두가 아끼던 인간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우돌리노가 실존 인물인지, 바우돌리노의 인생이 진짜인지를 소설 자체에서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그것이다. 그런 바보같은 이야기가 역사에 남는다고 좋을 것이 하나도 없소, 그러니 엄청난 거짓말쟁이가 등장하여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를 하게 놔 두시오. (당신이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요!)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우돌리노라는 인간에게 긍정적이며 바우돌리노의 인생을 응원한다. (그래서 결국 바우돌리노는 히파티아를 찾아, 요한 사제 왕국을 찾아 다시 떠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움베르트 에코의 화신이기도 하는 바우돌리노는 자신이 하는 "거짓말=이야기"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잊기 위해서 말입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이 결국 이 세계마저 바꿔 놓게 된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p 169)

4. 바우돌리노는 3번의 사랑을 겪는다. 첫째는 그의 양어머니이기도 한 황후 베아트릭스, 두번째는 고향 마을의 어린 처녀였던 콜란드리나, 그리고 마지막은 반인반양의 히파티아, 베이타릭스가 그가 범접할 수 없었고 그저 꿈꿨던 이상의 사랑이라면, 콜란드리나는 친밀감과 편안함의 사랑이고, 히파티아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히파티아가 바우돌리노와 동등한 입장에서 논쟁하며 서로가 상보적인 역할이 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희대의 거짓말쟁이인 바우돌리노의 상상력이 개입될 필요가 없는 인물-히파티아를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이라면 콜란드리나는 편안한 가족같은 사랑이다. 콜란드리나는 바우돌리노를 따르고 존경하며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운명앞에서 좌절된다. 바우돌리노의 첫사랑이자 황후의 경우, 그는 현실의 베아트릭스가 아닌 자신의 상상속의 베아트릭스를 사랑한다.(실제로 자신이 1인 2역을 하며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한다) 그래서 베아트릭스에 대한 사랑이 깨어지고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상상이 무의미해지며, 따라서 그의 다른 상상을 쫓아가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요한사제의 왕국을 찾는 모험이다. 바우돌리노는 이것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내게는 가장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뭔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 나는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했나보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치유된 상처와 같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내게 기분 좋은 추억을 불러 일으켰지만 떨림은 없었습니다. 나는 고통없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고 아픔을 맛보지 않고도 그녀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내가 완전히 어른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년기의 모든 열정이 잠재워졌습니다. 그 사실이 유감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조금 우울했을 뿐입니다. 나는 서슴지않고 우는 비둘기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을 나누는 계절은 끝이 난 것이지요. 이제 몸을 움직여 바다 너머로 가야했습니다."

5. 결국 바우돌리노의 한 평생은 그의 모험의 끝이자 프리드리히를 살해한 범인을 밝히는, 소설의 첫부분-역사학자 니케타스와의 만남-으로 돌아오는데, 프리드리히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가능성을 남김으로써 다시 한 번 <바우돌리노>라는 소설 자체에 대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엔딩은 결국 바우돌리노는 꿈과 상상, 모험과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움베르트 에코의 박학다식과 특유의 유머감각들이 부분부분 빛을 바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기독교적 논쟁들도 프리드리히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라는 흥미진지한 소재로 덮어씌워 이끌고 가니, 이 정도의 이야기를 이 정도의 재미로, 일반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에코 밖에 없다고 다시 한 번 느낀다.

바우돌리노 - 움베르트 에코(09. 15)
바우돌리노(상) 상세보기


6. 그렇게 바우돌리노는 요한 사제의 왕국을 찾아 떠났는데, 나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하고 있다. 책을 다 읽었지만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책의 효과는 미래로 나를 밀어주지 못하고, 나는 묵직한 무게의 고집으로 제자리에 있는다고 우기는데, 그래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 없는 현실임을 알아서 조금 슬프다. 아, 머리를 흔들어 잡념들을 털어버려야 할텐데.

덧, 아이다움에 대한 움베르트 에코의 통찰(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며 깔깔 웃어줬음)

>>누비아인들은 어린아이들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빨리 하고 싶어한다(5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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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
서재2009. 8. 30. 02:45


교보문고에서 두툼한 플라스틱 끈에 묶인 책들이 날라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직원에게 <이거 지금 살 수 있어요?>라고 물어봤다. 난 분당 교보에서 1Q84를 처음으로 산 손님인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 전부터 1권은 되게 재미있고 2권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을 어딘가에서 주워들었었다. 2권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그것도 9월 8일 출간 예정이니 지금부터따져서도 열흘 이상 남았다.) 이미 그런 말들이 떠도는 것은 우리시대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얼마나 인기있는 작가인지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리라.

모든 문학작품이 그렇듯, 하루키처럼 엄청나게 많은 수의 독자층을 확보한 사람도, 역시 그 엄청나게 많은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식으로 작품을 받아들인다. 나로서는 스물 다섯 이후에야 하루키의 진가를 알게 된 케이스인데, 그 직전까지 내게 하루키는 "가벼운 일본 문학의 선두주자"라는 이미지였다. (스물 다섯에 깨달은 것은 하루키는 하루키고, 일본 현대 문학은 어쨌든 가벼운데, 그렇게 치면 현대 문학은 몇몇의 기라성 같은 작가들과 가볍디 가벼워서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버릴 가벼운 작가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 뿐이다. 이게 현대 뿐이겠는가. 언제나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는 한두명 뿐이지 않는가) 아무튼 각설하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 현실에서 나의 고민과의 접점이 점점 많이 생겨나서 인 것 같다. 내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들을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주인공이라면 반항할 수 없는 힘에 끌려 엄청나게 몰입할 수 밖에 없으니. 1Q84에서도 개인의 삶/역사/문학에 대한 많은 질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소설 전체를 가로지르며 <내가 사는 이 세계가 진정한 세계인가>에 대해 묻고 있는데, 그러면서 1984년 일본과 1Q84년의 일본이 묘하게 겹쳐지기 시작한다. <역사는 고쳐쓸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강하게 말하는 주인공이지만, 주인공 개인의 기억 역시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어 무엇하나 확신할 수 없는 것, 그리고 그 모든 기억의 불확실함은 결국 인간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함이 아닐까라는 이야기가 엮어지는데, 아직 1권을 읽었으니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추측하기는 이른 것 같다.

몇 일전 H와 이야기를 하던 도중 H가 말했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너무나 일본적이지 않은 일본 작가 아냐? 그러니까 내 말은, 일본 밖에서 객관적으로 일본을 그리려고 한다고 나는 생각하는데>라고. 우리는 늦여름의 밤에 H의 차로 향해 걷고 있었기 때문에 격렬한 문학토론이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그 의견에 갸우뚱한다. 내가 보는 누구보다 사회성이 짙은 이야기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들 같은데 말이다. 하지만 사회적 문제 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해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탄탄한 이야기적 구성이 그 많은사람을 그의 팬으로 이끌고 있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어찌되었든 문학평론 같은 것은 잘 읽는 편이 아니니 문학전문가들의 객관적인 의견의 대세는 알 수 없다.

소설은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번갈아가면서 나오는 식으로 전개되는데 한쪽은 여자인 아오마메, 또 한쪽은 남자인 덴고이다. 아오마메가 최근(1권중간쯤 -_-; ) 친구를 하나 만들었는데 이름은 아유미. 아오마메와 아유미의 대화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지워버리고 싶은, 혹은 벗어나고 싶은 과거에 대해서. 아오마메의 독백이 인상적이었는데, 과거의 그 기억으로 부터 자신은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뿌리가 그 기억에 있어 평생 그 곳으로 부터 양분을 받아먹으며 자라는 것 같다고. 소박하게 아오마메의 뿌리가 그곳에 있지 않은 것만 누군가가 확실히 해주고 이야기를 끝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결국 주인공에 감정이입중이다. 열심히.

괜히 옛 어른들의 말씀이 옳은 것이 아니듯이, 명성이라는 것이 또 괜히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은 일단 재미있고 (이 말인 즉슨 1Q84 역시 1권은 확실히 재미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읽고나서 생각해볼 만한 질문들을 던진다 (본인도 책에서 말한다. 작가란 질문을 던지는 자라고.) 어찌되었든 내가 소설을 판단하는 큰 기준은 그것 두개니까 나는 좋은 점수를 주어야지. 오랜만에 읽은 만한 소설책이 나와서 기분이 좋다. 그리고는 새삼, 최근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것은 읽을 만한 작가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핑계대본다.

1Q84. 1 상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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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2 - [Subjects] - 소설 읽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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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
서재2009. 7. 23. 01:52

1. 카프카는 1883년에 태어나 1924년에 죽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쓴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것. 그러나 그의 친한 친구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인간인지라(이름은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를 우리에게 소개 시켜준다. 그리고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르트르 까뮈등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우리의 골치거리로 등장한다.

2. 일단은 여기저기 자신의 카프카의 화신이라도 되는듯 카프카니안을 외치는 어설픈 예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런 저런 작품들에 카프카니안이라고 이름 붙여 어렵게 해설하는 문학 평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카프카에 대해 단 몇 줄로 서술해버리는 교과서에 의하여, 그는 골치거리로 부상한다. 그는 어쩌면 이런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의 글들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평생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 했으니 그 쯤은 알았을 것이다.

3. 내가 카프카를 처음 읽은 것은 기억에 고1때였다. 미안하게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한국말인 것은 알겠는 말들로 떠들어대는 문학교과서에 비해 그의 소설, 변신은 너무 짧고, 단순했다. 솔직히, 재미없었다. 나는 무지 철없고 행복한 고1이었고, <공부를 못해도 나는 니가 좋아>라고 말해주는 부모님과 형제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먹고 살 걱정 같은 것 없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는 것도, 그래서 가족들마저 등 돌리는 것도, 결국 죽는 것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10년이 넘게 지나 나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지만, 조금은 카프카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냉혹한 현실을 알게 되어서? 그러나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잠자의 기분을 생각한다. 자신이 사람이었었던 적은 있었는지? 지금은 벌레인지 사람인지 묻는 그의 마음에 귀기울인다. 전영애 교수(서울대학교)는 변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4.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해제집 中>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적으로 읽힌다.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이 조명되고 있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잠자에게서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자유'로서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누이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 그레고르가 던지는, 이렇게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데도 내가 한 마리 벌레란 말인가 라는 절실한 물음, 또 '미지의 양식'에 대한 그의 강한 이끌림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추구와 맞닿아 있어 신학적. 해석학적으로 읽게 되기도 한다.

5. 사실은 오늘 <시골 의사>를 읽었다. 우연히도 내가 산 카프카 선집에는 시골의사가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그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겠지만, 환상적인 분위기를 꽤나 좋아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변신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단박에 2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으니까.
말 한마리가 인간의 영역이라면, 말 두마리는 운명(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은 절대로 나를 대신 할 수 없다고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세번째로 읽으니, 이 글, 결코 긍정적인 문장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6.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 <소용없는 일이다><방법을 찾을 수 없다>
소년은 앓아누워서 말한다 <선생님 저를 죽여주세요> 시골의사는 마음 속으로 대답한다 <그래> 시골의사는 처음에 소년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한 대 때려서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게 해야한다고. 그런데 그 다음 독백은 이렇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를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둔다. 이 지역에 고용된 나는 너무벅차다 싶을 정도로 변두리까지 멀리 나가 임무를 다한다. 보수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그들을 기꺼이 돕는다. 나는 아직 로자를 보살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도 죽고 싶다. 끝날 줄 모르는 이 겨울에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겠는가...(중략)... 처방을 쓰는 일은 쉽지만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렵다...(중략)... 나는 경우에 따라서 소년이 아프다고 시인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다 시골의사는 소년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는 소년이 죽을 만큼 심각하다. 그러자 소년은 말한다 <"저를 구해 주실 건가요?" 소년은 자신의 상처 속에 있는 생명체로 인해 완전히 기겁을 하고 훌쩍거리며 속삭인다. 내 구역의 사람들은 다 이렇다. 그들은 옛 신앙을 잃었다. 사제는 집에 앉아 미사복을 하나씩 하나씩 갈가리 찢는다. 그러나 의사는 부드러운 외과의의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자, 좋으실대로. 내가 자청하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나를 성스러운 목적으로 쓴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도대체 이 의사. 삶에 대해 적극적인 것도, 능동적인 것도 하나 없다. 주변을 변화시킬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비웃듯이 의사는 다음 독백을 이어간다 <더없이 참착함을 유지 하는 나는 모든 이보다 우월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쯤 되면 나도 판정패를 인정한다. 앓아 누운 소년은 죽어가며 나의 구원병 역할을 해준다. 시골의사에게 나는 널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딘가에서 떨어졌을 뿐이지, 제발로 걸어오신 것도 아닌>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어? 라고 말한다. (근데 인간은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서로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자 의사는 소년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다. 너 살 수 있어. 이거 별거 아니야. 라고. (나 좀 믿어주라?) 그리고는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는 소년 처럼 상처를 끓어앉고 침대에 누워, 다른 의사가 나타나 그를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발가벗은 채 불행한 이 시대의 혹한에 나앉아 현세의 마차를 타고 내세의 말들에게 이끌려 늙은 나는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7.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3회독을 마친다. 카프카는 너무나 잔인하게도 현실적인 현실을 묘사했고, 그 현실에는 구원도 출구도 없고 오직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머리는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왜 마음은 아닐까. 왜 마음은 시골의사가 자신의 삶을 믿는다고. 내가 나의 삶을 믿듯이, 내가 나의 존재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믿듯이( 그렇지만 아직 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뿐인 것이라고 늘 변명하면서), 시골의사도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이거, 엄청나게 삶에 대해 긍정적인 나라서, 소설을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걸까?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게 카프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 미치는.이렇게 소설이 마음을 울리니까 나는 벌레가 아니고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럼, 타인에게 미치는 카프카의 힘은?

8. 나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글 다운)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싶어>와 같은 말은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자살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변태성욕자가 되고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살인자가 되듯이 말이다. 즉, 소설을 읽는 것은 나의 <생에 대한 사랑>이 작가의 <생에 대한 사랑>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이런 개똥 철학이 도화지고, 나는 모든 소설을 이 생각 안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카프카를 읽고, 삶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느낀다. 한 순간 한 순간 의미 있기 위한 그의 몸부림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울린다.

9. 타인에게는? 타인의 개똥철학이 있을 것이다.

10. 참고로 카프카를 좋아하시는 서울대 전영애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아까에 이어서 남기셨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주는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해석도 담겨 있지 않다. 결코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지극히 담담하게 또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만 있다. 본문에서는 어떤 미약한 희망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는 이 충격적이고 막막한 이야기에서 삶과 세상과 존재에 대한 깊고 새로운 인식을 획득하고, 나아가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모색케 되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된다. (역시 권장도서해제집 中)

덧, 원래 카프카가 변신을 출판할 때 편집자가 표지에 벌레 그림을 그려넣으려고 했으나, 카프카가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그레고리가 변한 벌레가 결코 그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서점에 가면 왠만한 카프카의 책에는 모두 그 놈의 벌레가 그려져있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불행하게도 막스 브로트 말고도 상대해야할 말은 지지리도 안듣는 사람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듯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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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변신.시골의사>

변신 시골의사(세계문학전집 4) 상세보기

Posted by aeons
서재2009. 7. 22. 00:38

1. 최근의 <읽은 책 목록>에서 소설의 비중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감수성이 메말라가는 것인지, 좀처럼 공감하는 소설을 찾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 자체가 재미없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O가 비행기를 타고 떠난 직후 집어 들었었다. O가 떠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O는 참 아무렇지도 않게 비행기를 타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보자며 바이바이를 말했지만, 막상 나는 별로 침착하거나 명랑한 기분은 아니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의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 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괴롭게 했다. 그 괴로움에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한동안은 못 볼 테니까, 금새 이 마음도 침착해 질꺼야> 뿐이었던 듯 싶다.
붙잡을 기둥 하나 찾지 못한 마음을 위해 12년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미도리, 니가 좋아, 봄날의 곰만큼. 이라고 말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O가 나에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함께 하면서.

3. 굉장히 슬펐던 사건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미도리에게 감정 이입하지 못하고,-그렇다고 나오코에게 감정 이입한 것도 아니었다- 하쯔미에게 엄청나게 몰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O는 나가사와 같은 놈이지 절대 <나>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말이 나왔다. 나가사와는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 사람, 이라고.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적히 포스트잌을 O의 머리에 철썩 붙여놓는다. 망할, 난 평행선 같은 것 그리고 싶지 않고, 자살도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의 기억속에서 이미 멀어진 상실의 시대 줄거리를 세세하게 늘어놓은 다음, 나는 하쯔미에게 감정 이입이 너무 되서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녀석이 대답했다. <넌 하쯔미처럼 예쁘지 않아>. 어, 그래 -_-;

4. 상실의 시대는 결국 비바람이 몰아치던 나의 마음에 아주 폭우를 쏟아붓게 만들었다. 상실의 시대는 나에게 <나는 왜 소설에서 꼭, 비극적인 인물에게 감정 이입 하는가?> 라는 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S에게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라고 이야기를 하자, S가 말했다. 난 꼭 버림 받은 마누라에 감정 이입하는데. 10년 사귀고 배신당한 여자친구라던지. 유유상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느낀다.

5. O가 떠난지 근 한달이 되어가고, 덩달아 상실의 시대를 읽은지도 한달이 되어가고, 그리고 그렇게 한 달만에, 짧다면 짧은 소설을 읽었다. 오늘.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 어디선가 얼핏 본 다음 꽤나 재미있을 것 같아 교보에서 찾아봤는데, 의외로 짧아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직도 회사에서 야근 중인 S에게 뱀장어 스튜를 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남편이랑 사는 여자가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돌아와서 죽어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남자랑 자는 거야. 라고 말하자 S가 물었다. <근데 왜 제목이 뱀장어 스튜야?>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인 자클린이 만들어 준 뱀장어 스튜래. 피카소가 뱀장어 스튜 그림을 그리고는 거기에, "이 그림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이라고 썼대. 결국 피카소의 안식처인게지. 소설 속에서 주인공 여자가 결국 남편에게 돌아가거든.>이라고 대답했다.


<<La Matelote - Pablo Picasso>>

그리고 S에게 덧붙였다. <나 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았어>

6. 아, 소설을 왜 읽는 지 알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때로는 마음의 안정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내 문제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 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정답은 없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에 최선의 선택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고 결론 짓는다.

7. 그런데 말이다. 문제가 남았다. 나에게는 돌아갈 남편 같은 것도 없고, 자클린처럼 뱀장어 스튜를 끓여줄 연인도 없고, 그렇다고 O에게 용감하게 다시 연락할 용기도 없는 것이다.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덧, 뱀장어 스튜는 저리 간단하게 요약 될 만큼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짧은 만큼 한 글자 한글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굉장히 몰입해서 봤고, 읽은 뒤의 느낌도 매우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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