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머무는 풍경'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2.01.16 그대가 그리운 날엔. 2
  2. 2011.05.30 기억 #1 5
  3. 2011.04.05 먼지 낀 너를 사랑해 4
  4. 2011.03.28 칫솔, 비데, My book list, 그 밖의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4
  5. 2011.03.16 그대, 그리고 나 6
  6. 2010.11.12 어느 날, 그해 여름. 5
  7. 2010.09.30 step1: As I am analysis
  8. 2010.09.02 그렇게 시간은 간다.
  9. 2010.08.20 한잔의 커피. 9
  10. 2010.08.05 그대의 그 특별함 2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2. 1. 16. 21:53


단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후로 한참 동안, 그 때 그게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왜 문 앞에 서 있다가 단박에 문을 열어주지 못했을까, 쫓아나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다시 오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이 잔뜩,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게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 "누군가가 나에게 옴"의 증거 이전에 그를 떠올린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그 때 내가 문 밖의 그를 발견하여 따뜻한 집안에서 그 온기를 나누며, 그가 왜 찾아왔는지, 불쑥 내가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지난 긴 시간동안의 그리움을 참아보다 결국 여기 이르렀는지를 이야기 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이에 뭐가 달라졌을까? 달라질 것이 없기에 우리는 이별 뒤에 긴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삶에 열중해 온 것 아닌가? 만났다 하더라도 시덥잖은 농담, 남 이야기,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그저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닌가?

그 때 당시에는 우리의 사랑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디에나 있는 무엇인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우리는 서로를 놓아버림으로써 위대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난 사랑이 덫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걸리면 상대가 죽지 않는 이상 몸을 뺄 수 없는 덫. 그게 아니라면, 그저 "좋아함"에 지나지 않는거라고.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난 죽을 듯이 괴롭지만, 그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덫 때문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포자기 속에서 때때로 이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모반을 꿈꾸며,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들, 혹은 그에게 나 같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그의 언행들을 수집하고는 한다. 결론은 어찌되었든,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가 나를 선택한적은 한 번 도 없다는 것. 그 분명한 증거를 손에 들고, 이제는 다시는 그를 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그렇지만 왜 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다짐을 하고 나면, 단 한 번, 단 한번만 더, 그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단 한 번 그를 보게 되고, 다시 그를 보지 않겠다는 다짐의 악순환의 쳇바퀴를 도는 것이다. 

결국 오늘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 숨소리, 그대 목소리, 그대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있지만, 홀로 방안에서, 내 마음이 세어나가면 큰일 날 것처럼 나는 마냥, 혼자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 #1  (5) 2011.05.30
먼지 낀 너를 사랑해  (4) 2011.04.05
칫솔, 비데, My book list, 그 밖의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4) 2011.03.28
그대, 그리고 나  (6) 2011.03.16
어느 날, 그해 여름.  (5) 2010.11.12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1. 5. 30. 18:55

 과천에 다녀왔다. 내 기억 속의 그 것과는 다르게 도시는 이미 시간을 잔뜩 머금어 군데군데 낡고 촌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성당을 따라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인적 없는 길에는 초여름의 푸르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어릴 때는 이 길이 이유없이 무서웠었다. 그 생각이 나자 웃음이 난다. 과천 초등학교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내 할머니와 함께 걷던 그 산책로가 예전과 같이 들장미들로 뒤덮여 있었고 나는 이제 곧 조그마한 다리가 나올거야,라고 속삭인다. 두근대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내 어린 시절이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과천은 5층짜리 낮은 아파트들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집 뒤에 있었던 놀이터. 동네 슈퍼 봄이면 덤으로 병아리도 팔았던 뽑기장수 아줌마. 그렇게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잔뜩 끌어담아 놓은 어린 시절의 보물 상자 같다. 모두들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지금 물어보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생각보다 작은 아파트 앞 잔디밭이 바라보이는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오빠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는 혼자 나와 이렇게 그네를 탔었다. 신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혼자서 뭔가 잘 할 수 있다고 증명 해 보이려 했던 인생의 첫 시도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혼자라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꼭 할머니가 가끔 바라볼 수 있게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이 자리에 앉았고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는 한 시간이 채 안되서 한 번, 다시 또 한 번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 홀로 있음은 내게 얼마나 마음 편함을 선사하는지. 하지만 그게 옛 기억에 젖으니 왜 이리 쓸쓸함을 불러 일으키는지. 혼자 잘 있을 수 있게 되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걸까라는 철 없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잠자리가 날기 시작하면 저 잔디밭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너무 많이 잡아서 채집통에서 서로 엉켜 죽어버리던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나와 내 형제는 본성에 잔인함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그 작은 생명체들을 쫓아 뛰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잡은 잠자리들을 방에서 풀어주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는 엄청난 자상함이나 이해심의 소유자일지고 모르겠다. 그래서 집안 대청소를 할때마다 전등 갓 안에서는 엄청난 잠자리 시체들이 나오고는 했고 그럼 나는 메스꺼움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밤새 뒤척이다 결국 할머니 품에 기어들어가고는 했다.

굳이 잠자리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1년 내내 나는 저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직업이었던 듯하다.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봄에는 봄이니까 여름에는 더우니까.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그렇게 내 달렸던 걸까. 문득 궁금해 진다. 그러다 지치면 할머니등에 엎혀 집에 오면 되었고 동네 남자애들이 괴롭히면 펑펑 울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울고있으면 싸움이라고는 태어나서 해 본 적이 없는 오빠가 그 녀석들, 내가 때려줄께라고 큰 소리를 쳐 주고는 했다. 그는 그게 나를 웃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절대 만났어도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땅의 모래를 부드럽게 걷어내어 그 안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꺼내려는 것 처럼 그네가 앞 뒤로 까딱 거릴 때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살아난다. 나는 그 시절, 그 기억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온 걸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고 큰 집이 과천초입에 있어 명절마다 근처까지 왔지만 이곳에 제대로 온 것은 이십년을 훌쩍 넘긴 뒤다.
물론 그 이 십년간 나는 너무나 커버렸고 어쩌면 그 꼬마 아가씨로부터는 상상조차 못할 사람으로 변해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고 중요치 않은 사건들도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고 어떤 것들은 아직도 손에 꼭 쥐고 있고 어떤 것들은 스쳐지나가게 놔 뒀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믿음을 잃어 이제 죽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아파한 적도 있었고 고통의 순간에 모르는 사람, 소설의 주인공, 노래 가사에 구원 받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밟아야만 하는 삶의 계단 한 칸이라고 믿으면서 왜 해야되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흘려버렸는지.
무엇을 그렇게 쫓아갔던 것인지 모르겠다. 표적을 놓친 후 생각해보니 목적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이 길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뛰어야 할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제 어린 시절처럼, 울어도 아무도 찾으러 와 주지 않고, 금새 마음에 드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지도 않아서 인 것 같다.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과 옛추억에 젖어보지만 해가 뉘었뉘었지면 내가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내 할머니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오빠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그네는 더 이상 내 몸에 맞지 앉는다. 모래를 밟는 신발 자국의 거대함이 나를 홀로 있을 수 있게하고 따뜻한 기억들이 미래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살아갈 내일이 있다는 것과 엄청나게 뜨거운 여름이 올 것을 예고하는 5월의 바람, 그 뿐이다.


# 작년 이맘때 쓴 글. 그리고 어제 갔다 왔다 과천 :3

Posted by aeons

2007년 4월 14일에 cyworld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 (스물 일곱의 감수성? ㅎㅎ)

----------------------------------------------------------------------------------

 예전에, 학교에서 어쩌다가 철근에 손등이 긁혀서 피가 철철 났던 적이 있다. 2cm가 조금 넘으려나? 가운데 손가락을 타고 세로로 0.3cm쯤 푹 파인 상처. 
 
본인은 기억도 못 할거라고 생각하고, 기억한데도 이 글을 보지 못할 테지만, 아무튼 그 때 그 녀석에게 다쳤다고 징징 대자, 손을 잡아쥐고는 채 어린 딱지가 앉을랑 말랑한 상처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흉 지지는 않겠다."
라고 조용히 말했었다.

 딱지가 떨어지고 사실 직후에는 흉터가 남아서, 꽤나 보기 흉했었는데 어느 순간 점점 옅어져서 6개월쯤? 혹은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가 헤어져버린 이후에 어느 순간 그 흉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흉이 사라져버린 것은 완전하게 그 녀석의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예전에 현정이가, 사람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상처 받은 것은 잊지 않는다고, 상처 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찬가지로, 상처를 치유해 준 사람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 보다 10년이 지나서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사건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나는 삐뚤어지고 싶었고, 혹은 그 보다 더 정확히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진 모든 것은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수 있고, 믿었던 사람은 배신할 수 있으며, 신뢰와 사랑의 언어들은 모두 거짓이 될 수 있다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도, 분명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궁지에 몰리면,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하고, 누군가에게 거침없이 상처주는 사람이라고. 10년을 더 살든 20년을 더 살든 혹은 지금 죽어버리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때의 모든 기억들을 잊거나, 모든 시련을 극복했느냐라고 묻는다면 물론 아직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틀렸었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건, 그 다음에 만난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대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렇게 나쁜 나를 좋아해 주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살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많은 실패를 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을 꺼야.라는 것을 배웠다랄까.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분명 그 사람은 나를 특별하게, 나도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한가득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잔뜩 곤두서서 타인에게 상처줄 준비만 완벽했던 나였는데, 그래도 지금 웃으면서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은 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꽤나 그 아이 덕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랑의 감정이 지나간 후의 두 사람은 서로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한다. 같은 추억은 두 가지 앵글로 찍혔고 두 필름은 전혀 다른 영화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에게 존중 받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상대를 아름답게 기억한다.

 분명 나는 그 아이에게서 존중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단지 헤어진 이후에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나는 존중 받았다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은, 결국 여지까지만큼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계이고, 비참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 너를, 니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는, 더 이상 너는, 서로에게 특별하게 대우 받지 못한다는 사실부터 온다. 서로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지만, 순식간에 많은 평범한 사람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확인할 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이에게 정말 고맙다. "제발 이 기억은 아름답게 간직하게 놔둬 주세요. 저한테는 소중해요." 라고 외치는 가엾은 나를 인정해줘서.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사랑에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랑만큼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 일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대와의 관계는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와"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오랜 기억속의 그 사람을, 그 사람과의 추억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만, 나에겐 먼지가 끼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 사진이 헤어진 뒤에도 계속 책상 위에 놓여져 있어, 365일 그리고 더 긴 시간을 반짝반짝 하게 빛을 발했다면, 분명 어디 쯤에서 나는 지쳐버렸을 테고, 더 이상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화가 났을 테고,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미워했을 것이다.

글쎄? 다시 연애할 수 있을까?
글쎄? 이런 식이라면 정말 아무나랑이나 만나서 결혼해서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애기신님이 점지하셔도 별로 끔찍하지 않을 것 같네?

라고 생각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말이다.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

먼지 낀 니가 보고프다.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가 그리운 날엔.  (2) 2012.01.16
기억 #1  (5) 2011.05.30
칫솔, 비데, My book list, 그 밖의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4) 2011.03.28
그대, 그리고 나  (6) 2011.03.16
어느 날, 그해 여름.  (5) 2010.11.12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1. 3. 28. 15:57


1. 자꾸 칫솔을 사대다보니 엄밀히 나 혼자 쓰는 화장실인데 칫솔은 4~5개가 꽃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조금 뻣뻣한 칫솔모가 좋기 때문에 미세모 칫솔 같은 것은 금세 장식용이 되어버기 일수다. 이를 세게 닦는 버릇이 있어 뻣뻣한게 맞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뻣뻣한 솔이 이빨에 닿을 때야 비로소 "닦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이다.

2. 어머니는 자기 주변에 비데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결국 하나를 사셨지만-그게 벌써 10년전-나는 도대체-지난 10년간-비데에는 적응을 못하겠다.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 살결에 닿는 뜨뜻한 온도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집 비데야 그렇다 쳐, 백화점 여자화장실에 멋들어지게 설치되어 있는 비데칸은... 아, 세상이 진보하여 나에게 미치는 "나쁜"점도 생기는 것이다.

3. 주로 연초나 연말에, 누군가가 읽은 책 목록을 포스팅하면, 내가 몰랐던, 그러나 재미있어보이는 녀석이 어디 없나 들여다 보게 된다. "H랑은 정말 한 두권 겹칠까 말까야"라고 내가 말하자 C가 이야기했었다. 독서목록처럼 누군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취향에 맞지 않으면 보지 않게 되잖아. 지극히 주관적인 성향이 보이는 리스트라고 생각해. 그거야 말로."

4. 예전에 SS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바를 어떻게 누르느냐(발로 밟느냐, 손으로 누르느냐)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특히 변기 뒤쪽에 설치 되어 있는 한 뼘안되는 바모양의 것일 경우.(이거 남자들은 이해 못할 이야기일까)
 물론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였지만, 나는 그 순간 17년간 친구였어도 "절대 절대 절대" 모를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마 결혼을 해서 같이살 게 되도, 배우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내리는 바를 발로 밟을 지 손으로 누를 지는 모르겠지. 지극히, 지극히, 개인적인 리스트들이 있다. 은밀하려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밀스럽기 그지 없는. 그 밖에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같은 것들.

5. L은 요즘 K를 보는 재미에 산단다. 주말이라 못봐서 어쩌냐는 나의 말에 L이 대답했다. "언니 원래도 열람실에 잘 안와요 ㅠㅠ" 
L이 귀여웠던 건, 아직 "짝사랑을 하는" 나이여서 일 수도 있고, 그 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K가 나타날까 기대하며 열람실에 -4시간째-앉아 있을 모습이 그려져서 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K는 지금 이 상황을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다. 언제나 짝사랑이 "상큼"한 이유는 그 비밀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6.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 아이가 망설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리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아이는 살짝 "가도 될까" 망설였다. 그렇지만 그 찰나를 지나 아이는 내게 아장아장 걸어와 목을 폭 끌어앉았다. 순수하게 "당신이 좋아"라는 마음이 와 닿던 순간, 세상에 단 한사람 나만이 기억하는 그 찰나에 나는 아이를 좋아하게 됐다.
 사랑에 빠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취향이 맞는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가치관이 비슷한지, 내가 꿈꾸는 모습을 가진 이인지, 같은 것들은 그저 기름에 불과하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스파클이 튀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99%의 이성을 만나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1%의 이성을 만나서도 생을 바쳐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가 웃었던 그 순간,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의 몸짓, 내가 사랑에 빠졌던, 비밀스러운 이유들을.


7.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중에서도 분명 내가 까맣게 모르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것, 누군가 나의 행동들을 보고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온전히 나에게 닿지 않기에 사람은 늘 외롭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지 아닐지 모르기에 망설인다. 타인의 사고관을 알지 못해서 오해를 사고, 타인을 알지 못하기에 스쳐지나보낸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수 없는 나의 은밀한 리스트들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조금 설레어하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다. 가장 더디게, 이제는 오긴 오는건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봄, 그 녀석을.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 #1  (5) 2011.05.30
먼지 낀 너를 사랑해  (4) 2011.04.05
그대, 그리고 나  (6) 2011.03.16
어느 날, 그해 여름.  (5) 2010.11.12
step1: As I am analysis  (0) 2010.09.30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1. 3. 16. 01:31

누군가에게서 우연히 그 사람의 이름을, 또 그 사람의 소식을 듣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셀 수 없이 많이 내 스스로 그 사람의 이름을 끄집어 내고,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상상해보고는 한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그와 나의 수많은 가상의 대화들 속에서 나는 늘 담담하고, 이제는 그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나와있으며 그만큼 덤덤하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조금 피가 빨리 돌기 시작하고, 동공이 확장되고, 피부가 긴장하며, 멜랑꼴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미묘한 여운이 하루종일 빙글빙글 내 주변에 맴돈다.

그렇지만 시간을 되감아 그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에 빠진 이후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희대의 살인마라고 해도 사랑에 빠진 이후에는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단점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단점 모두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미쳤다. 그는 그랬던 내가 부담스러웠을까? 혹은 우리는 같이 미쳐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보려해도 그때의 그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걸까 과연.

오늘 우연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썼던 작은 우산에 한 쪽 어깨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은근하게 다가와 머물던 그의 따뜻한 냄새 때문에, 비오는 날이면 그가 생각난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말 이 자리에 머물렀던가? 함께였던가? 서로를 응시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랑했던가?
그런 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0. 11. 12. 03:28



A가 가을에 얽힌 추억에 대해 이야기 해보라고 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았는데 가을이 아니라 여름에 얽힌 이야기가 생각나서 적어본다.

정확히 날짜는 생각 안나지만 한 여름의 어느날이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는 그 순간 공항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그 때 내가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못 볼 것 같다고 느낀 것은 그 순간에는 어느정도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분명 나를 보면 놀란 토끼눈이 되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올테지? 그가 나를 강하게 거부 할까, 또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구나라는 웃음을 지어보이며 귀엽게 봐 줄까 나는 좀처럼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망설였지만 뛰어 나갔다.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렇게 한 사람을 만나야만 한다는 데만 집착했다.
그러나 평소같으면 1분에 한대씩 지나가는 마을 버스는 10분을 기다려도 오지 않았고, 내가 공항버스를 타는 곳까지 뛰어가고 있을 때 공항버스가 막 출발했기에 나는 한참을 허무하게 그 버스의 꽁무니만을 바라봐야했다. 그리고 15분마다 한대씩 있는 버스가 하필 그 시간만 그 다음 차는 30분 뒤였으니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다면 그는 그 날 그와 나를 못 만나게 할 작정이었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그와 헤어졌다. 그리고 꽤 오랜동안 다시 만나지 못했고, 다시 만났을 때는 이미 서로에게부터 너무 멀리 걸어나와 밤톨같이 쪼매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결론이 어찌 되었든 공항에 제 시간에 갈 수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 비오듯 쏟아져 내리는 땀을 손 끝으로 걷어올리던 그 순간, 땀에 부딪혀 반짝이던 그 작열하던 태양을 잊지 못한다. 그 날은 내게 생에 가장 뜨거운 여름날도 기억될 것이다. 몸도 마음도 완전 연소해버렸고 그와 함께 그 철없던 사랑도 한 더미 재가 되어 사라졌으니까.
그는 내가 그리 아웅바둥 거리며 그를 만나기 위해 뛰었다는 것을 상상조차 못할 테지만, 괜찮다. 그 날의 태양은 나를 위해 그리도 뜨거웠던 것이다. 내 청춘의 마지막 장에 그 열기를 각인 시키기 위하여. 그 토록 뜨거웠던 순간이 나를 위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하여.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칫솔, 비데, My book list, 그 밖의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4) 2011.03.28
그대, 그리고 나  (6) 2011.03.16
step1: As I am analysis  (0) 2010.09.30
그렇게 시간은 간다.  (0) 2010.09.02
한잔의 커피.  (9) 2010.08.20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0. 9. 30. 05:41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대, 그리고 나  (6) 2011.03.16
어느 날, 그해 여름.  (5) 2010.11.12
그렇게 시간은 간다.  (0) 2010.09.02
한잔의 커피.  (9) 2010.08.20
그대의 그 특별함  (2) 2010.08.05
Posted by aeons



무섭게 몰아치던 비바람에 자다깨다를 반복하고는 늦은 오후 눈을 떴다. 어느새 맑은 하늘이 고개를 쭈삣 내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모양새가 신기할 따름. 그래도 간 밤에 내 방 창문을 무섭게 두드리던 그 쿵쿵 대던 소리와 찢어질 듯한 바람의 비명이 마음 언저리에 남아 아직 조금 두렵고 또 반대로 고운 햇살에 살포시 마음을 놓아본다.

처음 춘천에 갔을 때 우리는 기차를 탔고 자전거를 빌렸고 다시는 못 올 곳처럼 이리 저리 빨빨 거리며 돌아다니다가 금새 지쳤고 그랬던 것 같다. 올 해의 우리는 경춘고속도로를 타고 40분만에 춘천시에 도착했고 차를 세우고 닭갈비를 먹었고 다들 소양강댐은 귀찮으니 숙소로 돌아가겠다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래도 H와 나는 그 10년전의 기억을 원동력 삼아 소양강댐에 오르며, 그 때 그랬지, 그 때 이런 일도 있었지, 얼굴이 시뻘개져서 자전거를 가지고 소양강댐에 올랐고, 배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갔고, 저기 저 숙소에서 잤고,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여전히 소양호 위는 사람들로 바글 댔고, 소양강댐이라는 흰 글씨를 배경삼아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이 덧없다는 듯 조용히 또 꾸준히 강은 흐르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를 만들고, 현재의 기억이 다시 미래로 나아가겠지. 강물의 흐름이 어느 정도 빠른지 몰라서 그 북한강의 물이 나보다 빨리, 혹은 나보다 느리게 서울에 도착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흐른다는 사실 이외의 모든 것은 강물이 흐르듯 모두 변해간다. 때로는 떠나간 것들을 모르고, 때로는 찾아온 것들을 모르고 당연한 듯 지금을 살아가고, 때로는 아쉬움과 쓸쓸함에 눈물이 그렁그렁 대고 때로는 고마움과 따뜻함에 웃음이 절로 나오지만 그것도 잠시 뿐, 금새 또 만나고 헤어지고, 즐겁고 슬프고가 반복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인생.

현재의 번민이 어젯밤의 태풍처럼 사라질 것이 당연한 것을 받아들이는 나이. Y의 말마따라 스물 열살.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날, 그해 여름.  (5) 2010.11.12
step1: As I am analysis  (0) 2010.09.30
한잔의 커피.  (9) 2010.08.20
그대의 그 특별함  (2) 2010.08.05
먼 곳에의 그리움  (3) 2010.07.25
Posted by aeons
그대가 머무는 풍경2010. 8. 20. 09:34



 편한게 최고인, 그래서 가정적이긴 하나 로맨틱하지는 않은 우리 아버지는 아침마다 봉지 커피를 타신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것을 좋아하시는데 블랙 믹스의 권장 사항은 물을 1.5배 부으라는 것. 그래서 항상  두 잔의 커피가 나오는 거라.
 그럼 어머니와 아버지는 나에게 들킬 새라 국민 그 커피를 나눠 드신다. 식사 후 나에게 "커피 마실래?" 라고 물어봐주는 날은 드립기계로 커피를 잔뜩 내린 날뿐. 어느날 내가 그것을 눈치채고 "왜 둘이만 마셔. 치사해 이거. " 라고 말했더니 아버지는 커피잔을 들고 방으로 도망가셨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억울하면 너도 결혼해. 니 남편이랑 나눠 마셔라."

 빈 집이 여름 원두막처럼 편하다는 어머니와 아버지지만 나는 집이 비면 세상에 나 혼자 살아남아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아직 나는 지구일까?
 늦은 오후, 며칠째 쌓인 피로함을 조금 덜어내고 나오니 햇살은 어느새 기력을 조금 잃었고 집에는 빈바람만이 남아있다. 잠에서 깨볼 양 커피를 타다가 부모님 생각이 나 저절로 조그만 웃음이 난다.

 누군가와, 커피를 나눠 먹고 싶네. 커피믹스을 물에 타는 것 뿐이지만 이 별에 너와 나, 둘만이라는 기분이 들어 즐거울 수 있는 누군가와.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ep1: As I am analysis  (0) 2010.09.30
그렇게 시간은 간다.  (0) 2010.09.02
그대의 그 특별함  (2) 2010.08.05
먼 곳에의 그리움  (3) 2010.07.25
Belief.  (2) 2010.06.21
Posted by aeons


San Francisco, CA
 

'그대가 머무는 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렇게 시간은 간다.  (0) 2010.09.02
한잔의 커피.  (9) 2010.08.20
먼 곳에의 그리움  (3) 2010.07.25
Belief.  (2) 2010.06.21
멈춰!(とまれ)  (1) 2010.06.19
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