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머무는 풍경2011. 5. 30. 18:55

 과천에 다녀왔다. 내 기억 속의 그 것과는 다르게 도시는 이미 시간을 잔뜩 머금어 군데군데 낡고 촌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성당을 따라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인적 없는 길에는 초여름의 푸르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어릴 때는 이 길이 이유없이 무서웠었다. 그 생각이 나자 웃음이 난다. 과천 초등학교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내 할머니와 함께 걷던 그 산책로가 예전과 같이 들장미들로 뒤덮여 있었고 나는 이제 곧 조그마한 다리가 나올거야,라고 속삭인다. 두근대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내 어린 시절이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과천은 5층짜리 낮은 아파트들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집 뒤에 있었던 놀이터. 동네 슈퍼 봄이면 덤으로 병아리도 팔았던 뽑기장수 아줌마. 그렇게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잔뜩 끌어담아 놓은 어린 시절의 보물 상자 같다. 모두들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지금 물어보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생각보다 작은 아파트 앞 잔디밭이 바라보이는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오빠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는 혼자 나와 이렇게 그네를 탔었다. 신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혼자서 뭔가 잘 할 수 있다고 증명 해 보이려 했던 인생의 첫 시도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혼자라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꼭 할머니가 가끔 바라볼 수 있게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이 자리에 앉았고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는 한 시간이 채 안되서 한 번, 다시 또 한 번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 홀로 있음은 내게 얼마나 마음 편함을 선사하는지. 하지만 그게 옛 기억에 젖으니 왜 이리 쓸쓸함을 불러 일으키는지. 혼자 잘 있을 수 있게 되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걸까라는 철 없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잠자리가 날기 시작하면 저 잔디밭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너무 많이 잡아서 채집통에서 서로 엉켜 죽어버리던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나와 내 형제는 본성에 잔인함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그 작은 생명체들을 쫓아 뛰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잡은 잠자리들을 방에서 풀어주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는 엄청난 자상함이나 이해심의 소유자일지고 모르겠다. 그래서 집안 대청소를 할때마다 전등 갓 안에서는 엄청난 잠자리 시체들이 나오고는 했고 그럼 나는 메스꺼움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밤새 뒤척이다 결국 할머니 품에 기어들어가고는 했다.

굳이 잠자리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1년 내내 나는 저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직업이었던 듯하다.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봄에는 봄이니까 여름에는 더우니까.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그렇게 내 달렸던 걸까. 문득 궁금해 진다. 그러다 지치면 할머니등에 엎혀 집에 오면 되었고 동네 남자애들이 괴롭히면 펑펑 울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울고있으면 싸움이라고는 태어나서 해 본 적이 없는 오빠가 그 녀석들, 내가 때려줄께라고 큰 소리를 쳐 주고는 했다. 그는 그게 나를 웃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절대 만났어도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땅의 모래를 부드럽게 걷어내어 그 안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꺼내려는 것 처럼 그네가 앞 뒤로 까딱 거릴 때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살아난다. 나는 그 시절, 그 기억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온 걸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고 큰 집이 과천초입에 있어 명절마다 근처까지 왔지만 이곳에 제대로 온 것은 이십년을 훌쩍 넘긴 뒤다.
물론 그 이 십년간 나는 너무나 커버렸고 어쩌면 그 꼬마 아가씨로부터는 상상조차 못할 사람으로 변해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고 중요치 않은 사건들도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고 어떤 것들은 아직도 손에 꼭 쥐고 있고 어떤 것들은 스쳐지나가게 놔 뒀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믿음을 잃어 이제 죽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아파한 적도 있었고 고통의 순간에 모르는 사람, 소설의 주인공, 노래 가사에 구원 받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밟아야만 하는 삶의 계단 한 칸이라고 믿으면서 왜 해야되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흘려버렸는지.
무엇을 그렇게 쫓아갔던 것인지 모르겠다. 표적을 놓친 후 생각해보니 목적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이 길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뛰어야 할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제 어린 시절처럼, 울어도 아무도 찾으러 와 주지 않고, 금새 마음에 드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지도 않아서 인 것 같다.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과 옛추억에 젖어보지만 해가 뉘었뉘었지면 내가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내 할머니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오빠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그네는 더 이상 내 몸에 맞지 앉는다. 모래를 밟는 신발 자국의 거대함이 나를 홀로 있을 수 있게하고 따뜻한 기억들이 미래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살아갈 내일이 있다는 것과 엄청나게 뜨거운 여름이 올 것을 예고하는 5월의 바람, 그 뿐이다.


# 작년 이맘때 쓴 글. 그리고 어제 갔다 왔다 과천 :3

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