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머무는 풍경2011. 3. 16. 01:31

누군가에게서 우연히 그 사람의 이름을, 또 그 사람의 소식을 듣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 셀 수 없이 많이 내 스스로 그 사람의 이름을 끄집어 내고, 그 사람의 현재 상태를 상상해보고는 한다. 그래서 이루어지는 그와 나의 수많은 가상의 대화들 속에서 나는 늘 담담하고, 이제는 그로부터 엄청나게 멀리 떨어져 나와있으며 그만큼 덤덤하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인정하기는 싫지만 조금 피가 빨리 돌기 시작하고, 동공이 확장되고, 피부가 긴장하며, 멜랑꼴리라고 부를 수 있는 그 미묘한 여운이 하루종일 빙글빙글 내 주변에 맴돈다.

그렇지만 시간을 되감아 그와의 관계를 다시 한번 시작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 나는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사랑에 빠진 이후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마 그가 희대의 살인마라고 해도 사랑에 빠진 이후에는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을 것이다. 그의 단점들이 보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의 단점 모두를 내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미쳤다. 그는 그랬던 내가 부담스러웠을까? 혹은 우리는 같이 미쳐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보려해도 그때의 그가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걸까 과연.

오늘 우연히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잘 만들어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와 함께 썼던 작은 우산에 한 쪽 어깨가 흠뻑 젖는 줄도 모르고 은근하게 다가와 머물던 그의 따뜻한 냄새 때문에, 비오는 날이면 그가 생각난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말 이 자리에 머물렀던가? 함께였던가? 서로를 응시했던가? 웃었던가? 울었던가? 사랑했던가?
그런 것들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