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카프카는 1883년에 태어나 1924년에 죽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쓴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것. 그러나 그의 친한 친구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인간인지라(이름은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를 우리에게 소개 시켜준다. 그리고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르트르 까뮈등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우리의 골치거리로 등장한다.
2. 일단은 여기저기 자신의 카프카의 화신이라도 되는듯 카프카니안을 외치는 어설픈 예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런 저런 작품들에 카프카니안이라고 이름 붙여 어렵게 해설하는 문학 평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카프카에 대해 단 몇 줄로 서술해버리는 교과서에 의하여, 그는 골치거리로 부상한다. 그는 어쩌면 이런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의 글들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평생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 했으니 그 쯤은 알았을 것이다.
3. 내가 카프카를 처음 읽은 것은 기억에 고1때였다. 미안하게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한국말인 것은 알겠는 말들로 떠들어대는 문학교과서에 비해 그의 소설, 변신은 너무 짧고, 단순했다. 솔직히, 재미없었다. 나는 무지 철없고 행복한 고1이었고, <공부를 못해도 나는 니가 좋아>라고 말해주는 부모님과 형제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먹고 살 걱정 같은 것 없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는 것도, 그래서 가족들마저 등 돌리는 것도, 결국 죽는 것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10년이 넘게 지나 나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지만, 조금은 카프카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냉혹한 현실을 알게 되어서? 그러나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잠자의 기분을 생각한다. 자신이 사람이었었던 적은 있었는지? 지금은 벌레인지 사람인지 묻는 그의 마음에 귀기울인다. 전영애 교수(서울대학교)는 변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4.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해제집 中>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적으로 읽힌다.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이 조명되고 있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잠자에게서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자유'로서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누이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 그레고르가 던지는, 이렇게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데도 내가 한 마리 벌레란 말인가 라는 절실한 물음, 또 '미지의 양식'에 대한 그의 강한 이끌림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추구와 맞닿아 있어 신학적. 해석학적으로 읽게 되기도 한다.
5. 사실은 오늘 <시골 의사>를 읽었다. 우연히도 내가 산 카프카 선집에는 시골의사가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그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겠지만, 환상적인 분위기를 꽤나 좋아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변신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단박에 2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으니까.
말 한마리가 인간의 영역이라면, 말 두마리는 운명(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은 절대로 나를 대신 할 수 없다고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세번째로 읽으니, 이 글, 결코 긍정적인 문장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6.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 <소용없는 일이다><방법을 찾을 수 없다>
소년은 앓아누워서 말한다 <선생님 저를 죽여주세요> 시골의사는 마음 속으로 대답한다 <그래> 시골의사는 처음에 소년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한 대 때려서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게 해야한다고. 그런데 그 다음 독백은 이렇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를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둔다. 이 지역에 고용된 나는 너무벅차다 싶을 정도로 변두리까지 멀리 나가 임무를 다한다. 보수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그들을 기꺼이 돕는다. 나는 아직 로자를 보살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도 죽고 싶다. 끝날 줄 모르는 이 겨울에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겠는가...(중략)... 처방을 쓰는 일은 쉽지만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렵다...(중략)... 나는 경우에 따라서 소년이 아프다고 시인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다 시골의사는 소년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는 소년이 죽을 만큼 심각하다. 그러자 소년은 말한다 <"저를 구해 주실 건가요?" 소년은 자신의 상처 속에 있는 생명체로 인해 완전히 기겁을 하고 훌쩍거리며 속삭인다. 내 구역의 사람들은 다 이렇다. 그들은 옛 신앙을 잃었다. 사제는 집에 앉아 미사복을 하나씩 하나씩 갈가리 찢는다. 그러나 의사는 부드러운 외과의의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자, 좋으실대로. 내가 자청하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나를 성스러운 목적으로 쓴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도대체 이 의사. 삶에 대해 적극적인 것도, 능동적인 것도 하나 없다. 주변을 변화시킬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비웃듯이 의사는 다음 독백을 이어간다 <더없이 참착함을 유지 하는 나는 모든 이보다 우월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쯤 되면 나도 판정패를 인정한다. 앓아 누운 소년은 죽어가며 나의 구원병 역할을 해준다. 시골의사에게 나는 널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딘가에서 떨어졌을 뿐이지, 제발로 걸어오신 것도 아닌>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어? 라고 말한다. (근데 인간은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서로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자 의사는 소년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다. 너 살 수 있어. 이거 별거 아니야. 라고. (나 좀 믿어주라?) 그리고는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는 소년 처럼 상처를 끓어앉고 침대에 누워, 다른 의사가 나타나 그를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발가벗은 채 불행한 이 시대의 혹한에 나앉아 현세의 마차를 타고 내세의 말들에게 이끌려 늙은 나는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7.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3회독을 마친다. 카프카는 너무나 잔인하게도 현실적인 현실을 묘사했고, 그 현실에는 구원도 출구도 없고 오직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머리는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왜 마음은 아닐까. 왜 마음은 시골의사가 자신의 삶을 믿는다고. 내가 나의 삶을 믿듯이, 내가 나의 존재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믿듯이( 그렇지만 아직 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뿐인 것이라고 늘 변명하면서), 시골의사도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이거, 엄청나게 삶에 대해 긍정적인 나라서, 소설을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걸까?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게 카프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 미치는.이렇게 소설이 마음을 울리니까 나는 벌레가 아니고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럼, 타인에게 미치는 카프카의 힘은?
8. 나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글 다운)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싶어>와 같은 말은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자살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변태성욕자가 되고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살인자가 되듯이 말이다. 즉, 소설을 읽는 것은 나의 <생에 대한 사랑>이 작가의 <생에 대한 사랑>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이런 개똥 철학이 도화지고, 나는 모든 소설을 이 생각 안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카프카를 읽고, 삶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느낀다. 한 순간 한 순간 의미 있기 위한 그의 몸부림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울린다.
9. 타인에게는? 타인의 개똥철학이 있을 것이다.
10. 참고로 카프카를 좋아하시는 서울대 전영애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아까에 이어서 남기셨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주는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해석도 담겨 있지 않다. 결코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지극히 담담하게 또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만 있다. 본문에서는 어떤 미약한 희망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는 이 충격적이고 막막한 이야기에서 삶과 세상과 존재에 대한 깊고 새로운 인식을 획득하고, 나아가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모색케 되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된다. (역시 권장도서해제집 中)
덧, 원래 카프카가 변신을 출판할 때 편집자가 표지에 벌레 그림을 그려넣으려고 했으나, 카프카가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그레고리가 변한 벌레가 결코 그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서점에 가면 왠만한 카프카의 책에는 모두 그 놈의 벌레가 그려져있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불행하게도 막스 브로트 말고도 상대해야할 말은 지지리도 안듣는 사람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듯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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