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2009. 7. 22. 00:38

1. 최근의 <읽은 책 목록>에서 소설의 비중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감수성이 메말라가는 것인지, 좀처럼 공감하는 소설을 찾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 자체가 재미없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O가 비행기를 타고 떠난 직후 집어 들었었다. O가 떠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O는 참 아무렇지도 않게 비행기를 타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보자며 바이바이를 말했지만, 막상 나는 별로 침착하거나 명랑한 기분은 아니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의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 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괴롭게 했다. 그 괴로움에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한동안은 못 볼 테니까, 금새 이 마음도 침착해 질꺼야> 뿐이었던 듯 싶다.
붙잡을 기둥 하나 찾지 못한 마음을 위해 12년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미도리, 니가 좋아, 봄날의 곰만큼. 이라고 말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O가 나에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함께 하면서.

3. 굉장히 슬펐던 사건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미도리에게 감정 이입하지 못하고,-그렇다고 나오코에게 감정 이입한 것도 아니었다- 하쯔미에게 엄청나게 몰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O는 나가사와 같은 놈이지 절대 <나>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말이 나왔다. 나가사와는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 사람, 이라고.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적히 포스트잌을 O의 머리에 철썩 붙여놓는다. 망할, 난 평행선 같은 것 그리고 싶지 않고, 자살도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의 기억속에서 이미 멀어진 상실의 시대 줄거리를 세세하게 늘어놓은 다음, 나는 하쯔미에게 감정 이입이 너무 되서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녀석이 대답했다. <넌 하쯔미처럼 예쁘지 않아>. 어, 그래 -_-;

4. 상실의 시대는 결국 비바람이 몰아치던 나의 마음에 아주 폭우를 쏟아붓게 만들었다. 상실의 시대는 나에게 <나는 왜 소설에서 꼭, 비극적인 인물에게 감정 이입 하는가?> 라는 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S에게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라고 이야기를 하자, S가 말했다. 난 꼭 버림 받은 마누라에 감정 이입하는데. 10년 사귀고 배신당한 여자친구라던지. 유유상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느낀다.

5. O가 떠난지 근 한달이 되어가고, 덩달아 상실의 시대를 읽은지도 한달이 되어가고, 그리고 그렇게 한 달만에, 짧다면 짧은 소설을 읽었다. 오늘.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 어디선가 얼핏 본 다음 꽤나 재미있을 것 같아 교보에서 찾아봤는데, 의외로 짧아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직도 회사에서 야근 중인 S에게 뱀장어 스튜를 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남편이랑 사는 여자가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돌아와서 죽어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남자랑 자는 거야. 라고 말하자 S가 물었다. <근데 왜 제목이 뱀장어 스튜야?>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인 자클린이 만들어 준 뱀장어 스튜래. 피카소가 뱀장어 스튜 그림을 그리고는 거기에, "이 그림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이라고 썼대. 결국 피카소의 안식처인게지. 소설 속에서 주인공 여자가 결국 남편에게 돌아가거든.>이라고 대답했다.


<<La Matelote - Pablo Picasso>>

그리고 S에게 덧붙였다. <나 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았어>

6. 아, 소설을 왜 읽는 지 알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때로는 마음의 안정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내 문제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 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정답은 없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에 최선의 선택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고 결론 짓는다.

7. 그런데 말이다. 문제가 남았다. 나에게는 돌아갈 남편 같은 것도 없고, 자클린처럼 뱀장어 스튜를 끓여줄 연인도 없고, 그렇다고 O에게 용감하게 다시 연락할 용기도 없는 것이다.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덧, 뱀장어 스튜는 저리 간단하게 요약 될 만큼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짧은 만큼 한 글자 한글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굉장히 몰입해서 봤고, 읽은 뒤의 느낌도 매우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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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지예 - 뱀장어 스튜(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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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