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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05 먼지 낀 너를 사랑해 4

2007년 4월 14일에 cyworld 미니홈피에 올렸던 글. (스물 일곱의 감수성?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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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에, 학교에서 어쩌다가 철근에 손등이 긁혀서 피가 철철 났던 적이 있다. 2cm가 조금 넘으려나? 가운데 손가락을 타고 세로로 0.3cm쯤 푹 파인 상처. 
 
본인은 기억도 못 할거라고 생각하고, 기억한데도 이 글을 보지 못할 테지만, 아무튼 그 때 그 녀석에게 다쳤다고 징징 대자, 손을 잡아쥐고는 채 어린 딱지가 앉을랑 말랑한 상처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흉 지지는 않겠다."
라고 조용히 말했었다.

 딱지가 떨어지고 사실 직후에는 흉터가 남아서, 꽤나 보기 흉했었는데 어느 순간 점점 옅어져서 6개월쯤? 혹은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가 헤어져버린 이후에 어느 순간 그 흉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흉이 사라져버린 것은 완전하게 그 녀석의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예전에 현정이가, 사람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상처 받은 것은 잊지 않는다고, 상처 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찬가지로, 상처를 치유해 준 사람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 보다 10년이 지나서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사건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나는 삐뚤어지고 싶었고, 혹은 그 보다 더 정확히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진 모든 것은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수 있고, 믿었던 사람은 배신할 수 있으며, 신뢰와 사랑의 언어들은 모두 거짓이 될 수 있다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도, 분명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궁지에 몰리면,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하고, 누군가에게 거침없이 상처주는 사람이라고. 10년을 더 살든 20년을 더 살든 혹은 지금 죽어버리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때의 모든 기억들을 잊거나, 모든 시련을 극복했느냐라고 묻는다면 물론 아직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틀렸었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건, 그 다음에 만난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대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렇게 나쁜 나를 좋아해 주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살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많은 실패를 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을 꺼야.라는 것을 배웠다랄까.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분명 그 사람은 나를 특별하게, 나도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한가득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잔뜩 곤두서서 타인에게 상처줄 준비만 완벽했던 나였는데, 그래도 지금 웃으면서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은 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꽤나 그 아이 덕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랑의 감정이 지나간 후의 두 사람은 서로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한다. 같은 추억은 두 가지 앵글로 찍혔고 두 필름은 전혀 다른 영화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에게 존중 받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상대를 아름답게 기억한다.

 분명 나는 그 아이에게서 존중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단지 헤어진 이후에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나는 존중 받았다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은, 결국 여지까지만큼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계이고, 비참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 너를, 니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는, 더 이상 너는, 서로에게 특별하게 대우 받지 못한다는 사실부터 온다. 서로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지만, 순식간에 많은 평범한 사람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확인할 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이에게 정말 고맙다. "제발 이 기억은 아름답게 간직하게 놔둬 주세요. 저한테는 소중해요." 라고 외치는 가엾은 나를 인정해줘서.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사랑에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랑만큼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 일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대와의 관계는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와"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오랜 기억속의 그 사람을, 그 사람과의 추억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만, 나에겐 먼지가 끼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 사진이 헤어진 뒤에도 계속 책상 위에 놓여져 있어, 365일 그리고 더 긴 시간을 반짝반짝 하게 빛을 발했다면, 분명 어디 쯤에서 나는 지쳐버렸을 테고, 더 이상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화가 났을 테고,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미워했을 것이다.

글쎄? 다시 연애할 수 있을까?
글쎄? 이런 식이라면 정말 아무나랑이나 만나서 결혼해서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애기신님이 점지하셔도 별로 끔찍하지 않을 것 같네?

라고 생각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말이다.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

먼지 낀 니가 보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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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