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와 만난 후, 나의 몸은 정직하게 이 스트레스를 받아들여서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정말 글자와 글자를 눈으로 확인한후 그것이 단어임을 인식하고, 다시 단어와 단어로 만들어진 문장이라는 것을 30초마다 한번씩 확인해가면서 바우돌리노를 읽었다. 하필이면 왜 그 상황에서 바우돌리노였어? 라고 누가 묻는다면, 그 상황에서는 무슨 책이든 인내심을 가지고 읽었을테니 결국 뭐였든 상관없었을꺼야.라고 대답했으리. 아무튼 그래서 내 인생에서 가장 인내심을 가지고 읽은 책 중에 하나가 되었다 바우돌리노.
2. 움베르트 에코는 실은 소설은 단 4권을 썼는데-장미의 이름,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전날의 섬을 안 읽은 나로서는 아직까지 1등은 푸코의 진자. 미안하게도 바우돌리노에 대한 평가는 절대로 객관적이 될 수가 없겠지만, 일단은 꼴지.(그렇지만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친구는 자기는 너무너무 재미있게 깔깔 거리면서 책장을 넘겼다고 증언했다)
3. 일단 바우돌리노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실제 중세 유럽에서 떠돌던 이야기들이나, 전해지던 이야기들. 그 모든 설화와 신화들이 뒤엉켜 탄생된 완전한 거짓 인간, 그러나 모두가 아끼던 인간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다. 처음부터 끝까지 바우돌리노가 실존 인물인지, 바우돌리노의 인생이 진짜인지를 소설 자체에서 끊임없이 의심하지만, 소설의 결론은 그것이다. 그런 바보같은 이야기가 역사에 남는다고 좋을 것이 하나도 없소, 그러니 엄청난 거짓말쟁이가 등장하여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를 하게 놔 두시오. (당신이 믿든 말든 당신의 자유요!)
그렇지만 작가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우돌리노라는 인간에게 긍정적이며 바우돌리노의 인생을 응원한다. (그래서 결국 바우돌리노는 히파티아를 찾아, 요한 사제 왕국을 찾아 다시 떠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움베르트 에코의 화신이기도 하는 바우돌리노는 자신이 하는 "거짓말=이야기"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세계에 사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잊기 위해서 말입니다. 적어도 당시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는 것이 결국 이 세계마저 바꿔 놓게 된다는 것을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p 169)
4. 바우돌리노는 3번의 사랑을 겪는다. 첫째는 그의 양어머니이기도 한 황후 베아트릭스, 두번째는 고향 마을의 어린 처녀였던 콜란드리나, 그리고 마지막은 반인반양의 히파티아, 베이타릭스가 그가 범접할 수 없었고 그저 꿈꿨던 이상의 사랑이라면, 콜란드리나는 친밀감과 편안함의 사랑이고, 히파티아는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다. 히파티아가 바우돌리노와 동등한 입장에서 논쟁하며 서로가 상보적인 역할이 되어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희대의 거짓말쟁이인 바우돌리노의 상상력이 개입될 필요가 없는 인물-히파티아를 상상하는 것은 무의미하다-이라면 콜란드리나는 편안한 가족같은 사랑이다. 콜란드리나는 바우돌리노를 따르고 존경하며 무엇이든 해주려고 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죽음이라는 운명앞에서 좌절된다. 바우돌리노의 첫사랑이자 황후의 경우, 그는 현실의 베아트릭스가 아닌 자신의 상상속의 베아트릭스를 사랑한다.(실제로 자신이 1인 2역을 하며 편지를 주고 받기도 한다) 그래서 베아트릭스에 대한 사랑이 깨어지고 더 이상 그녀에 대한 상상이 무의미해지며, 따라서 그의 다른 상상을 쫓아가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요한사제의 왕국을 찾는 모험이다. 바우돌리노는 이것을 어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내게는 가장 달콤 쌉싸름하면서도 뭔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 나는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했나보다.
"이제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치유된 상처와 같았습니다. 그녀의 시선은 내게 기분 좋은 추억을 불러 일으켰지만 떨림은 없었습니다. 나는 고통없이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고 아픔을 맛보지 않고도 그녀에게서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내가 완전히 어른이 되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청년기의 모든 열정이 잠재워졌습니다. 그 사실이 유감스럽다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다만 조금 우울했을 뿐입니다. 나는 서슴지않고 우는 비둘기 같은 기분이 들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랑을 나누는 계절은 끝이 난 것이지요. 이제 몸을 움직여 바다 너머로 가야했습니다."
5. 결국 바우돌리노의 한 평생은 그의 모험의 끝이자 프리드리히를 살해한 범인을 밝히는, 소설의 첫부분-역사학자 니케타스와의 만남-으로 돌아오는데, 프리드리히의 죽음에 대해 다양한 해석과 다양한 가능성을 남김으로써 다시 한 번 <바우돌리노>라는 소설 자체에 대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엔딩은 결국 바우돌리노는 꿈과 상상, 모험과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
엄청난 인내심을 발휘하기는 했지만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 움베르트 에코의 박학다식과 특유의 유머감각들이 부분부분 빛을 바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다시 한 번 등장하는 기독교적 논쟁들도 프리드리히의 죽음을 둘러싼 미스테리라는 흥미진지한 소재로 덮어씌워 이끌고 가니, 이 정도의 이야기를 이 정도의 재미로, 일반 독자들에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에코 밖에 없다고 다시 한 번 느낀다.
바우돌리노 - 움베르트 에코(0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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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렇게 바우돌리노는 요한 사제의 왕국을 찾아 떠났는데, 나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하고 있다. 책을 다 읽었지만 읽기 전이나 읽은 후나 달라진 것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한다. 책의 효과는 미래로 나를 밀어주지 못하고, 나는 묵직한 무게의 고집으로 제자리에 있는다고 우기는데, 그래봤자 달라질 것이 하나 없는 현실임을 알아서 조금 슬프다. 아, 머리를 흔들어 잡념들을 털어버려야 할텐데.
덧, 아이다움에 대한 움베르트 에코의 통찰(개인적으로 크게 공감하며 깔깔 웃어줬음)
>>누비아인들은 어린아이들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빨리 하고 싶어한다(5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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