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재2009. 7. 27. 11:23
1. 진화론은 유전자 수준에서의 변이가 각 개체에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차이가 다시  환경에 의해 선택된다는 이론이다. 그리하여 환경에 유리한 특성이 계속해서 살아남는다는. 진화론에 있어 환경에 의해 선택되는 행태는 다시 두가지로 나뉘는데, 그 개체가 처한 자연환경에 의해 선택되는 것과, 개체가 배우자에 의해 선호되는 정도인 성선택으로 나뉜다.
성선택이 뭐야? 응, 우리는 유전적으로 더 우수한 배우자를 선택하는 본능이 있다는 거지. 라는 짤막한 대화를 듣다가 불쑥 슬퍼졌다. 망할. 아무에게도 선택받고 있지 못하잖아. 라는 생각이 들어서.

2. 최근의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학계의 코드는 <진화>다. 기존의 학문들은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가정하고 출발하지만,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은 계속해서 변하는 존재다. 그러니까, 어찌되었든 "지금"은 완벽히 합리적일 수 없다.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었지만 <여지까지 잘 해왔어요>라는 의미지 <앞으로도 계속 잘 할 꺼에요>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단순히 진화이론이 시작된 것은 다윈 부터지만, 최근은 그 경향이 각 학문으로 퍼져나가, 진화의학, 진화심리학, 행동경제학 등으로 응용된다.

3. 네스의 <인간은 왜 병에 걸리는가?>라는 책에서는 질식사를 이렇게 설명한다. 원래 아가미 호흡을 하던 어류의 일부(척추동물의 조상이다)가 육지로 올라오면서 허파가 발달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래 입에서 위로 이어지던 통로밖에 없었다가, 허파가 발달하면서 기도가 만들어진다. 허파와 기도가 지금 모습으로 발전하기 전까지는 식도를 대신 호흡의 수단으로 사용할 수 밖에 없었고, 인간까지 진화하면서, 완벽하게 분리되지 못하고 기도와 식도의 교차점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음식이 걸리면 우리는 켁켁 거리다 죽는 것이다. 어쩌다가? 매년 10만명 중 하나가 질식사한다고 한다. 하긴 우리나라의 사망원인 (통계청 홈페이지 자료를 뒤적여보면, 좀 철이 지나기는 했으나, 2007년 우리나라 사망원인 1위는 암으로 10만명당 137.5명, 2위가 뇌혈관질환(59.6명), 3위가 심장질환(43.7)명이다. 자살이 4위로 24.8명, 교통사고가 15.5명으로 6위다) 에서 1위를 하려면 10만명 중 150명정도는 매년 죽어줘야하니, 어쩌다가라고 할 수도 있겠다. 옆길로 샜지만, 아무튼 인간은 이렇게, 그때그때 환경에 맞춰 진화해왔다는 것이고, 과거의 흔적들을 완벽히 지우지 못한 특징들을 여기저기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4. 진화 심리학자인 개리 마커스는 인간의 몸 뿐만 아니라 심리학적 면에서도 인간은 클루지다, 라고 이야기한다. 클루지(Kluge)라는 것은 사전에 설계하여 최적의 재료들을 모아 만들어낸 장치가 아니라, 있는 것을 가지고 대강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게 만들어낸 장치를 말한다. 위키 백과는 이렇게 설명한다.
Kluge: an ad hoc engineering solution, inelegant in principle but possibly elegantly pragmatic, from klug [German] meaning clever. 
책이 물론 많은 영역에서 인간 심리의 클루지적 측면을 이야기하지만 여기서는 그 중 하나만 살펴본다.
인간이 지금과 같은 문화를 이룩하지 못하고, 그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동물의 하나로 보는 게 더 나았을 무렵에는, 빠른 선택이 중요시 되었다. 예를 들면, 지리산에서 반달곰을 만났다라고 생각하자, 도망 갈 것인가 죽은 척 할 것인가? 이 상황에서 도망 갔을 경우 벌어질 일들과 죽은 척 했을 경우 벌어질 일들을 생각한 후, 각각의 확률을 계산 하고 있으면, 당신의 살 확률은 확실히 0에 수렴한다. 조상님들은 하도 그런 상황에 많이 노출 되어서, 경험으로 습득했다. 뱀을 보면, 소리를 지르자. 바퀴 벌레를 봐도 소리를 지르자. 변태를 봐도 소리를 지르자(아, 또 옆길로 새려고 한다.)
그러나 기계화 정보화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을 이룩한 뒤 인간이 의도치 않게 곰을 만날 확률도 뱀을 만날 확률도 무척 적어졌다. 현대 사회에서는 계산하는 인간, 합리성을 쫓는 인간이 더 생존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진화의 습성을 버리지 못한 인간의 뇌는 언제나 갈등한다. 빨리 선택할 것인가, 신중하게 선택할 것인가. 이걸 쉽게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이렇다
<이성이냐 본능이냐>

5. 그럼 다시 아무에게도 선택받고 있지 못한 나의 상황으로 돌아와보자. 간락햐게 설명하자면 이렇다. 나의 주변에는 이성이 발달한 사람들만이 바글바글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빌 게이츠만큼은 아니어도 적당히 현대사회에 잘 적응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이성적인 잣대로 측량할 수 있는 것들 (수량화 될 수 있는 것에는 많은 것들이 있다. 기수 서수 합치면 그 범위는 늘어난다. 우리는 쉽게 A대학보다 B대학에 높은 점수를 주고, 직업 C보다 직업 D에 더 좋은 점수를 부여하니까. 그러니까 측량 가능한 것이 가진 돈, 사는 집의 시세, 키, 몸무게 뿐만은 아니라는 것이다.)을 선호한다. 분명 집에서 엑셀로 목록을 만들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나는 엄청 본능적인 연애를 원한다는 것이다. (-_-; 그렇다고 한편의 야한 드라마를 찍겠다는 것은 아니고) 기왕이면, 별 이유없이, <나는 왠지 알 수 없지만 니가 좋겠어>가 좋다는 뜻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성의 잣대를 들이대면 나의 본능은 도망갈 준비를 함으로, 이건 연애가 되지 않는다. 고객의 Needs에 부응하지 못하는 사기업이 바로 나다.
게다가 우연히도 내 본능이 적절한 사람을 택해주면 연애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는데, 내 본능은 엉뚱한 녀석만을 쫓는다. 외국에 살고 연인이 있는 O같은 놈에게 마음 설레하고, 내겐 너무 잘난 Z씨에게는, 계절마다 갈아엎어지는 보도블록에게 보이는 관심만큼도 보이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게 내가 클루지여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한가지는 확실하다. 나는 인류의 커다란 진화에 있어서 선택받을 개체는 아니라는 것.

6. 올해 일본 예능계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오와라이(코메디언? 으로) 콤비인 오오도리의 와카바야시가 어느 방송에 나와서, 자신이 좋아하는 말(? 좋아하는 말이었는지, 기억하고 싶은 말이었는지, 되새길 말이었는지 아무튼 그런 류의 말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로서 댄 것이 있다.
<약한 물고기가 육지에 올랐다>라는 말.
자신들이 인기를 얻게 된 이유가, 자신들이 지지리도 인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인기를 얻기 위해 고민하고 자신들의 개그를 바꿔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 말이 마음에 든다. 나, 육지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어도 되니? (왠지 대답이 돌아올 사람에게 물으면 그 대답에 좌절 할 거 같아서 대답없는 블로그에 대고 묻는다)
 
7. 육지로 올라가는 건 뭘까?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했으니 선택할까? -_-; 라는 거? 자신감을 보이고 싶지만, 사실 말이다. 성선택은 여자가 하는 거다. 어라? 아무에게도 선택받지 못한게 아니라 아무도 선택하고 있지 않은게 문제란 말인가? 이런, 갑자기 여지까지의 논의들의 가치가 아주 가벼워지는 순간이다. 
아니지, 어쩌면 나는 인류의 성선택권이 여자에게서 남자에게로 확장되는 어마어마한 진화의 순간을 인지한 개체인지도 모른다. 과연 이게 인류의 생존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클루지-게리마커스 (7.1)
클루지: 생각의 역사를 뒤집는 기막힌 발견 상세보기


Posted by aeons
서재2009. 7. 23. 01:52

1. 카프카는 1883년에 태어나 1924년에 죽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이 쓴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는 것. 그러나 그의 친한 친구는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인간인지라(이름은 막스 브로트다) 카프카를 우리에게 소개 시켜준다. 그리고 그를 열렬히 지지했던, 사르트르 까뮈등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에 의하여 그는 우리의 골치거리로 등장한다.

2. 일단은 여기저기 자신의 카프카의 화신이라도 되는듯 카프카니안을 외치는 어설픈 예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그런 저런 작품들에 카프카니안이라고 이름 붙여 어렵게 해설하는 문학 평론가들에 의하여, 그리고 카프카에 대해 단 몇 줄로 서술해버리는 교과서에 의하여, 그는 골치거리로 부상한다. 그는 어쩌면 이런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의 글들을 다 태워버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럼, 평생 인간 삶의 진실에 대해 집요하게 추구 했으니 그 쯤은 알았을 것이다.

3. 내가 카프카를 처음 읽은 것은 기억에 고1때였다. 미안하게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지만 한국말인 것은 알겠는 말들로 떠들어대는 문학교과서에 비해 그의 소설, 변신은 너무 짧고, 단순했다. 솔직히, 재미없었다. 나는 무지 철없고 행복한 고1이었고, <공부를 못해도 나는 니가 좋아>라고 말해주는 부모님과 형제를 가지고 있었다. 친구들도 많았고, 즐거운 일도 많았다. 먹고 살 걱정 같은 것 없었다. 그러니까, 하루 아침에 벌레가 되는 것도, 그래서 가족들마저 등 돌리는 것도, 결국 죽는 것도 남의 나라 이야기였다.
10년이 넘게 지나 나의 상황은 달라진 것이 하나 없지만, 조금은 카프카를 이해하게 된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냉혹한 현실을 알게 되어서? 그러나 꾸물꾸물 기어다니는 잠자의 기분을 생각한다. 자신이 사람이었었던 적은 있었는지? 지금은 벌레인지 사람인지 묻는 그의 마음에 귀기울인다. 전영애 교수(서울대학교)는 변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4. <전영애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서울대학교 권장도서 해제집 中>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실존주의적으로 읽힌다.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내던져진 인간의 실존이 조명되고 있다. 조용히 숨을 거두는 잠자에게서 그 조건들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자유'로서의 죽음을 읽을 수 있다. 누이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 그레고르가 던지는, 이렇게 음악이 마음을 울리는데도 내가 한 마리 벌레란 말인가 라는 절실한 물음, 또 '미지의 양식'에 대한 그의 강한 이끌림은 근원적인 존재론적 추구와 맞닿아 있어 신학적. 해석학적으로 읽게 되기도 한다.

5. 사실은 오늘 <시골 의사>를 읽었다. 우연히도 내가 산 카프카 선집에는 시골의사가 실려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에서야 그 글을 접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겠지만, 환상적인 분위기를 꽤나 좋아하기 때문에 나로서는 변신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다. 단박에 2번이나 반복해서 읽었으니까.
말 한마리가 인간의 영역이라면, 말 두마리는 운명(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은 절대로 나를 대신 할 수 없다고 믿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말이다. 집에 돌아와서 세번째로 읽으니, 이 글, 결코 긍정적인 문장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6. 가장 많이 나오는 문장 <소용없는 일이다><방법을 찾을 수 없다>
소년은 앓아누워서 말한다 <선생님 저를 죽여주세요> 시골의사는 마음 속으로 대답한다 <그래> 시골의사는 처음에 소년이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한다. 이럴 때는 한 대 때려서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게 해야한다고. 그런데 그 다음 독백은 이렇다 <그러나 나는 세상을 개선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그를 누워 있도록 내버려 둔다. 이 지역에 고용된 나는 너무벅차다 싶을 정도로 변두리까지 멀리 나가 임무를 다한다. 보수는 형편없지만, 그래도 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관대하며 그들을 기꺼이 돕는다. 나는 아직 로자를 보살펴야 하고, 그 다음으로 소년이 권리가 있을 터이며, 나도 죽고 싶다. 끝날 줄 모르는 이 겨울에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겠는가...(중략)... 처방을 쓰는 일은 쉽지만 사람들을 이해시키는 일은 어렵다...(중략)... 나는 경우에 따라서 소년이 아프다고 시인할 자세가 되어있다>
그러다 시골의사는 소년의 상처를 발견한다. 그 상처는 소년이 죽을 만큼 심각하다. 그러자 소년은 말한다 <"저를 구해 주실 건가요?" 소년은 자신의 상처 속에 있는 생명체로 인해 완전히 기겁을 하고 훌쩍거리며 속삭인다. 내 구역의 사람들은 다 이렇다. 그들은 옛 신앙을 잃었다. 사제는 집에 앉아 미사복을 하나씩 하나씩 갈가리 찢는다. 그러나 의사는 부드러운 외과의의 손으로 모든 일을 해내야 하는 것이다. 자, 좋으실대로. 내가 자청하지는 않았으니까. 당신들이 나를 성스러운 목적으로 쓴다면, 나 역시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둘 수 밖에> 도대체 이 의사. 삶에 대해 적극적인 것도, 능동적인 것도 하나 없다. 주변을 변화시킬 의지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비웃듯이 의사는 다음 독백을 이어간다 <더없이 참착함을 유지 하는 나는 모든 이보다 우월하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이 나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쯤 되면 나도 판정패를 인정한다. 앓아 누운 소년은 죽어가며 나의 구원병 역할을 해준다. 시골의사에게 나는 널 믿지 않는다고 말한다. <어딘가에서 떨어졌을 뿐이지, 제발로 걸어오신 것도 아닌> 당신을 내가 어떻게 믿어? 라고 말한다. (근데 인간은 모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는 믿을 수 없는 존재인 서로를 믿으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자 의사는 소년을 안심시키는 말을 한다. 너 살 수 있어. 이거 별거 아니야. 라고. (나 좀 믿어주라?) 그리고는 자신은 도대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을까 생각한다. 그는 소년 처럼 상처를 끓어앉고 침대에 누워, 다른 의사가 나타나 그를 구원해주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침대로 돌아가지 못한다. <발가벗은 채 불행한 이 시대의 혹한에 나앉아 현세의 마차를 타고 내세의 말들에게 이끌려 늙은 나는 이리저리 떠돌고 있다.>

7. 이렇게 한 문장 한 문장 손가락으로 더듬어 가며 3회독을 마친다. 카프카는 너무나 잔인하게도 현실적인 현실을 묘사했고, 그 현실에는 구원도 출구도 없고 오직 죽음만이 있다는 것을 머리는 알겠다. 그런데 말이다. 왜 마음은 아닐까. 왜 마음은 시골의사가 자신의 삶을 믿는다고. 내가 나의 삶을 믿듯이, 내가 나의 존재가 의미있는 것이라고 믿듯이( 그렇지만 아직 내 존재의 의미를 찾지 못했을 뿐인 것이라고 늘 변명하면서), 시골의사도 그렇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이거, 엄청나게 삶에 대해 긍정적인 나라서, 소설을 내 마음대로 해석해 버리는 걸까? 그렇지만 그보다는, 이게 카프카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에게 미치는.이렇게 소설이 마음을 울리니까 나는 벌레가 아니고 사람이야, 라고 생각하게 하는. 그럼, 타인에게 미치는 카프카의 힘은?

8. 나는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글 다운) 글을 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는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싶어>와 같은 말은 아니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자살하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변태성욕자가 되고 누군가는 너무 삶을 사랑해서 살인자가 되듯이 말이다. 즉, 소설을 읽는 것은 나의 <생에 대한 사랑>이 작가의 <생에 대한 사랑>과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내 이런 개똥 철학이 도화지고, 나는 모든 소설을 이 생각 안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카프카를 읽고, 삶에 대한 작가의 애착을 느낀다. 한 순간 한 순간 의미 있기 위한 그의 몸부림에 공감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안의 무엇인가를 울린다.

9. 타인에게는? 타인의 개똥철학이 있을 것이다.

10. 참고로 카프카를 좋아하시는 서울대 전영애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아까에 이어서 남기셨다

그러나 이런 가능성을 주는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직접적인 해석도 담겨 있지 않다. 결코 사실이 아닌 어처구니 없는 현실을 지극히 담담하게 또 매우 리얼하게 그리고만 있다. 본문에서는 어떤 미약한 희망조차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독자는 이 충격적이고 막막한 이야기에서 삶과 세상과 존재에 대한 깊고 새로운 인식을 획득하고, 나아가 결코 이러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을 모색케 되는 기이한 힘을 얻게 된다. (역시 권장도서해제집 中)

덧, 원래 카프카가 변신을 출판할 때 편집자가 표지에 벌레 그림을 그려넣으려고 했으나, 카프카가 이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그레고리가 변한 벌레가 결코 그려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무엇이냐면, 서점에 가면 왠만한 카프카의 책에는 모두 그 놈의 벌레가 그려져있다는 것이다. 카프카는 불행하게도 막스 브로트 말고도 상대해야할 말은 지지리도 안듣는 사람들을 잔뜩 가지고 있는듯해 보인다.

권장도서해제집
권장도서 해제집 상세보기
카프카 <변신.시골의사>

변신 시골의사(세계문학전집 4) 상세보기

Posted by aeons
서재2009. 7. 22. 00:38

1. 최근의 <읽은 책 목록>에서 소설의 비중은 급속하게 줄어들고 있다. 감수성이 메말라가는 것인지, 좀처럼 공감하는 소설을 찾기 힘든 것인지, 아니면 그저 소설 자체가 재미없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 가장 최근에 읽은 소설은 <상실의 시대>(무라카미 하루키). O가 비행기를 타고 떠난 직후 집어 들었었다. O가 떠난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O는 참 아무렇지도 않게 비행기를 타고, 다음에 한국에 오면 보자며 바이바이를 말했지만, 막상 나는 별로 침착하거나 명랑한 기분은 아니었다. 먼 곳에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인데, 나의 마음이 이렇게 싱숭생숭 하다는 사실 자체가 나를 괴롭게 했다. 그 괴로움에 한 가지 위안이 있다면, <한동안은 못 볼 테니까, 금새 이 마음도 침착해 질꺼야> 뿐이었던 듯 싶다.
붙잡을 기둥 하나 찾지 못한 마음을 위해 12년전에 읽었던 상실의 시대를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미도리, 니가 좋아, 봄날의 곰만큼. 이라고 말하는 <나>를 만나기 위해. O가 나에게 말해주면 좋겠다는 유치한 생각을 함께 하면서.

3. 굉장히 슬펐던 사건은, 상실의 시대를 읽으며 나는 미도리에게 감정 이입하지 못하고,-그렇다고 나오코에게 감정 이입한 것도 아니었다- 하쯔미에게 엄청나게 몰입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O는 나가사와 같은 놈이지 절대 <나>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그런 말이 나왔다. 나가사와는 문제가 생기면 그 때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하는 사람, 이라고.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적히 포스트잌을 O의 머리에 철썩 붙여놓는다. 망할, 난 평행선 같은 것 그리고 싶지 않고, 자살도 하고 싶지 않은데.
친구의 기억속에서 이미 멀어진 상실의 시대 줄거리를 세세하게 늘어놓은 다음, 나는 하쯔미에게 감정 이입이 너무 되서 괴로웠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 녀석이 대답했다. <넌 하쯔미처럼 예쁘지 않아>. 어, 그래 -_-;

4. 상실의 시대는 결국 비바람이 몰아치던 나의 마음에 아주 폭우를 쏟아붓게 만들었다. 상실의 시대는 나에게 <나는 왜 소설에서 꼭, 비극적인 인물에게 감정 이입 하는가?> 라는 굵직한 질문 하나를 남겼다.  S에게 나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라고 이야기를 하자, S가 말했다. 난 꼭 버림 받은 마누라에 감정 이입하는데. 10년 사귀고 배신당한 여자친구라던지. 유유상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님을 느낀다.

5. O가 떠난지 근 한달이 되어가고, 덩달아 상실의 시대를 읽은지도 한달이 되어가고, 그리고 그렇게 한 달만에, 짧다면 짧은 소설을 읽었다. 오늘. 권지예의 <뱀장어 스튜>. 어디선가 얼핏 본 다음 꽤나 재미있을 것 같아 교보에서 찾아봤는데, 의외로 짧아서 후다닥 읽어버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아직도 회사에서 야근 중인 S에게 뱀장어 스튜를 읽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프랑스에서 가난한 남편이랑 사는 여자가 2~3년에 한 번씩 한국에 돌아와서 죽어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남자랑 자는 거야. 라고 말하자 S가 물었다. <근데 왜 제목이 뱀장어 스튜야?>
<피카소의 마지막 연인인 자클린이 만들어 준 뱀장어 스튜래. 피카소가 뱀장어 스튜 그림을 그리고는 거기에, "이 그림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면"이라고 썼대. 결국 피카소의 안식처인게지. 소설 속에서 주인공 여자가 결국 남편에게 돌아가거든.>이라고 대답했다.


<<La Matelote - Pablo Picasso>>

그리고 S에게 덧붙였다. <나 왠지 모르지만, 마음의 안정을 찾았어>

6. 아, 소설을 왜 읽는 지 알았다.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서. 때로는 마음의 안정을 망가뜨리기 위해서. 내 문제에 공감을 얻기 위해서. 내 문제의 해답을 얻기 위해서. 정답은 없지만, 사람들은 각자의 문제에 최선의 선택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고, 나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기 위해서 인지도 모르겠다고 결론 짓는다.

7. 그런데 말이다. 문제가 남았다. 나에게는 돌아갈 남편 같은 것도 없고, 자클린처럼 뱀장어 스튜를 끓여줄 연인도 없고, 그렇다고 O에게 용감하게 다시 연락할 용기도 없는 것이다. 망했다. 라는 생각이 든다.

덧, 뱀장어 스튜는 저리 간단하게 요약 될 만큼 가벼운 소설이 아니다. 짧은 만큼 한 글자 한글자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어서, 굉장히 몰입해서 봤고, 읽은 뒤의 느낌도 매우 좋았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7.3)
상실의 시대:원제 노르웨이의 숲 상세보기
권지예 - 뱀장어 스튜(7.21)
뱀장어 스튜(제26회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2002년도) 상세보기




'서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1Q84,무라카미 하루키  (0) 2009.08.30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0) 2009.08.16
타임 패러독스-필립 짐바르도  (0) 2009.08.01
클루지 - 게리 마커스  (0) 2009.07.27
소설 읽기 (2)-카프카,시골의사  (0) 2009.07.23
Posted by ae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