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꾸 칫솔을 사대다보니 엄밀히 나 혼자 쓰는 화장실인데 칫솔은 4~5개가 꽃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조금 뻣뻣한 칫솔모가 좋기 때문에 미세모 칫솔 같은 것은 금세 장식용이 되어버기 일수다. 이를 세게 닦는 버릇이 있어 뻣뻣한게 맞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뻣뻣한 솔이 이빨에 닿을 때야 비로소 "닦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이다.
2. 어머니는 자기 주변에 비데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결국 하나를 사셨지만-그게 벌써 10년전-나는 도대체-지난 10년간-비데에는 적응을 못하겠다.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 살결에 닿는 뜨뜻한 온도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집 비데야 그렇다 쳐, 백화점 여자화장실에 멋들어지게 설치되어 있는 비데칸은... 아, 세상이 진보하여 나에게 미치는 "나쁜"점도 생기는 것이다.
3. 주로 연초나 연말에, 누군가가 읽은 책 목록을 포스팅하면, 내가 몰랐던, 그러나 재미있어보이는 녀석이 어디 없나 들여다 보게 된다. "H랑은 정말 한 두권 겹칠까 말까야"라고 내가 말하자 C가 이야기했었다. 독서목록처럼 누군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취향에 맞지 않으면 보지 않게 되잖아. 지극히 주관적인 성향이 보이는 리스트라고 생각해. 그거야 말로."
4. 예전에 SS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바를 어떻게 누르느냐(발로 밟느냐, 손으로 누르느냐)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특히 변기 뒤쪽에 설치 되어 있는 한 뼘안되는 바모양의 것일 경우.(이거 남자들은 이해 못할 이야기일까)
물론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였지만, 나는 그 순간 17년간 친구였어도 "절대 절대 절대" 모를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마 결혼을 해서 같이살 게 되도, 배우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내리는 바를 발로 밟을 지 손으로 누를 지는 모르겠지. 지극히, 지극히, 개인적인 리스트들이 있다. 은밀하려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밀스럽기 그지 없는. 그 밖에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같은 것들.
5. L은 요즘 K를 보는 재미에 산단다. 주말이라 못봐서 어쩌냐는 나의 말에 L이 대답했다. "언니 원래도 열람실에 잘 안와요 ㅠㅠ"
L이 귀여웠던 건, 아직 "짝사랑을 하는" 나이여서 일 수도 있고, 그 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K가 나타날까 기대하며 열람실에 -4시간째-앉아 있을 모습이 그려져서 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K는 지금 이 상황을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다. 언제나 짝사랑이 "상큼"한 이유는 그 비밀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6.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 아이가 망설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리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아이는 살짝 "가도 될까" 망설였다. 그렇지만 그 찰나를 지나 아이는 내게 아장아장 걸어와 목을 폭 끌어앉았다. 순수하게 "당신이 좋아"라는 마음이 와 닿던 순간, 세상에 단 한사람 나만이 기억하는 그 찰나에 나는 아이를 좋아하게 됐다.
사랑에 빠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취향이 맞는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가치관이 비슷한지, 내가 꿈꾸는 모습을 가진 이인지, 같은 것들은 그저 기름에 불과하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스파클이 튀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99%의 이성을 만나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1%의 이성을 만나서도 생을 바쳐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가 웃었던 그 순간,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의 몸짓, 내가 사랑에 빠졌던, 비밀스러운 이유들을.
7.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중에서도 분명 내가 까맣게 모르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것, 누군가 나의 행동들을 보고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온전히 나에게 닿지 않기에 사람은 늘 외롭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지 아닐지 모르기에 망설인다. 타인의 사고관을 알지 못해서 오해를 사고, 타인을 알지 못하기에 스쳐지나보낸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수 없는 나의 은밀한 리스트들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조금 설레어하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다. 가장 더디게, 이제는 오긴 오는건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봄, 그 녀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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