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구급차를 타면서 여기 올 때만 해도, 오늘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는데,
그래도 이제 병실에서도 인터넷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간병인으로써는 (사실 간병을 하고 있는건지 아니니도 모르겠지만) 꽤나 고무적인 상황.(이라고 마무리하자)
2.
아버지의 상황은 다소 심각하지만 - 지금보다 수술 후 한동안이 더 힘들 것이다 - 엄마와 나는 이게 장기적으로는 좋은 쪽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세상에 엄마랑 똑같은 생각을 했다니! 이건 정말, 나로써는 뜨악인 사건이었다.)
3.
삶을 순간이라는 칼로 탁, 잘라내면, 그 단면에는 언제나 장점과 단점, 강점과 약점이 산재해있다.
때로는 슬픔에 눈이 멀어 기쁨과 즐거움이 보이지 않고,
때로는 자신의 못난 점이 너무 눈에 띄어서 한없이 초라해보일지라도,
사실은 항상 우리는 우리 삶을 지탱해나갈 만한 "힘"을 내 안 어딘가에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고,
요즘 특히 깨닫게 된다.
4.
헤어진지 두 달이 되지 않는 시점.
나는 우연이 우리가 좋아했던 노래들을 들으면서, 정말 내가 그 사람이 나랑 비슷한 감수성을 지녔다고 생각했었던 사실에 웃음이 났다. 숨어있는 인디씬의 노래들을 찾아내며 좋다고 말하고, 수업시간에 나란히 앉아 이어폰을 귀에 꽂아주고는 했었는데, 그는 정말, 정말 나랑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마 내가 정말 "그렇게" 믿어의심치 않았기 때문에 내 충격은 더 컸고,
'이별'이라는 선택보다는 그 방법에서 난 정말 백기를 들고 싶었다.
이제 정말 그만.
그렇지만 가끔 이렇게 함께 좋아했던 노래를 들으면, 씁쓸한 기억에 잠기면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 목록에서 이 곡을 빼 버릴까 고민할테고, 시간이 더 지나면 그조차 생각하지 않게 되겠지.
오랜만에 글을 쓴다. 블로그를 버리고 새로 열까하다가, 그래도 있는 놈을 잘 다독여보자는 심정으로 다시 로그인.
어이없게도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던 근 2년간의 글들을 빠른 속도로 없애고, 뭐, 내가 진짜 순진했었지 라는 썩소도 한 번 날려준 다음, 이 글을 쓴다.
예전에 S의 블로그 타이틀이 "열심히 살기 위한 블로그"여서 혼자 큭큭 댄 적이 있는데, 내가 지금 그렇다. 블로그를 다시 시작하는 이유는 열심히 살기 위해서. (힝 -_-;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지금 숙제 마감 1시간 반 전이라서 이러는 거 절대 아니다...;; )
아무튼 지난 몇 주간의 나의 상태를 정리해보자면,
나는 마음의 폐허를 딛고 일어났고,
그럼에도 아직도 가끔 황무지의 바람이 내 평안을 괴롭히고,
잠을 잘 못자서 담에 걸린다음,
정형외과에 가기 싫어서 징징대다가
약국에서 사 온 약을 먹고 알러지가 돋아서
병원에 반나절 입원했다.
일주일간의 공포는 이런 거였다. 얼굴이 예전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쩌지. 평생 이렇게 살게 되면 어쩌지. 이건 도대체 언제 없어지는 거지. 등등. 그렇지만 밀린 크리미널마인드와 NCIS와 NCIS LA와 the killing과 Strike back과 홈랜드와 영화 몇편을 보고 났더니 얼굴은 정상 궤도로 돌아왔다.
그리고 의사와의 전화통화에서, 알레르기 반응 때문인지 현재 갑상선 항진 상태라고 나오지만, 증상이 사라짐과 함께 갑상선수치도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갑상선 항진? S가 예전에 이야기했던 그 갑상선항진? 이라는 생각에 웃겨서 S의 열심히 살기위한 블로그에 들어갔는데, 타이틀이 바껴있어서 또 혼자 큭큭댔다.
단 한 번 노크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후로 한참 동안, 그 때 그게 그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내가 왜 문 앞에 서 있다가 단박에 문을 열어주지 못했을까, 쫓아나가 그 사람을 붙잡지 않았을까, 그 사람이 다시 오지 않을까 같은 생각들이 잔뜩,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게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그 "누군가가 나에게 옴"의 증거 이전에 그를 떠올린적이 없는데......
그렇지만 그 때 내가 문 밖의 그를 발견하여 따뜻한 집안에서 그 온기를 나누며, 그가 왜 찾아왔는지, 불쑥 내가 생각난 것인지 아니면 지난 긴 시간동안의 그리움을 참아보다 결국 여기 이르렀는지를 이야기 했다 하더라도, 우리 사이에 뭐가 달라졌을까? 달라질 것이 없기에 우리는 이별 뒤에 긴 침묵을 지키며 자신의 삶에 열중해 온 것 아닌가? 만났다 하더라도 시덥잖은 농담, 남 이야기,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그저 사는 이야기들을 주고 받으며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닌가?
그 때 당시에는 우리의 사랑이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어디에나 있는 무엇인가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우리는 서로를 놓아버림으로써 위대해 질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게 이 이야기의 끝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난 사랑이 덫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걸리면 상대가 죽지 않는 이상 몸을 뺄 수 없는 덫. 그게 아니라면, 그저 "좋아함"에 지나지 않는거라고. 그리고 그 후로 지금까지 난 죽을 듯이 괴롭지만, 그건 나를 옭아매고 있는 덫 때문이기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포자기 속에서 때때로 이 덫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모반을 꿈꾸며,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증거들, 혹은 그에게 나 같은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그의 언행들을 수집하고는 한다. 결론은 어찌되었든, 십년이 넘는 기간동안 그가 나를 선택한적은 한 번 도 없다는 것. 그 분명한 증거를 손에 들고, 이제는 다시는 그를 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다. 그렇지만 왜 인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 다짐을 하고 나면, 단 한 번, 단 한번만 더, 그를 보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해서 단 한 번 그를 보게 되고, 다시 그를 보지 않겠다는 다짐의 악순환의 쳇바퀴를 도는 것이다.
결국 오늘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 숨소리, 그대 목소리, 그대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고 있지만, 홀로 방안에서, 내 마음이 세어나가면 큰일 날 것처럼 나는 마냥, 혼자 그대가 그립다.
1.
예전에 13이 그랬었더랬다. 내 머리속 지우개 같은 건 다 개뻥이야, 아프면 개인 위생이 떨어져서 예쁠 수 없다고. 아무리 걔가 손예진이어도 냄새나는 손예진이라니까.라고.
개인위생이 떨어진 우리집은 난장판이 되었다.(집에 나 뿐이니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오늘 새벽 내가 내다 버린 음식물쓰레기를 가장한 비닐봉투만 3개. 무슨 귤이 9개 든 주제에 8000원을 하냐며 투덜거리며 산 귤 중 2개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에서 딩굴다 이미 물러져 있었는데, 그제서야 걔가 귤이 아니라 천혜향임을 알았다. 그래도 같이 사 온 우유는 제 시간에 냉장고에 넣어서 다행이다. 일어날 수 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집을 치운다. 개인 위생이 양호한 세계로~!!
2.
쌓인 설겆이를 하기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을 틀었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서 찬공기와 맞닿아 손목과 팔꿈치 사이의 어딘가에쯤 장마전선이 형성되면서 습기가 몰아쳐 깜짝 놀라 팔을 확 잡아 뺄때까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설겆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먹을 때는 이따 금새 설겆이 할 거니까~ 라고 생각했던 간짬뽕을 볶은 냄비에 부어놓았던 따뜻한 물은 이미 냉수가 되다 못해 빙수가 되려하고 있었고,미리 떼어내지 않은 간짬뽕의 흔적들은 냉혹하게 냄비에 엉겨 붙어있었다. 그래, 맛있는 것은 흔적을 남기지, 흔적을 남기는 것은 지우기 어렵고, 인생이 다 그렇지, 먹을 때나 좋았지. 따위의 감상을 쏟아내며 빡빡, 수세미질을 했다.
3.
실은 거나하게 독한 술을 들이부은 날이 아닌 이상 먹은 것을 게워내는데는 별로 취미가 없는데, 아마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단순히 아파서 약 1.5m떨어져서 반대로 열리는 내 방문과 화장실문 1초만에 열기 신공을 보이며 침대위에서 화장실까지 날아가는 잽싼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막판에는 침대 옆에 비닐봉지를 걸어두는 준비성을 보였지.
다음날 아침에 내가 먹을 죽을 내가 쑤면서, 한 손으로는 내 배를, 한손으로는 가스레인지를 부둥켜안고, 혼자 사는데 아프면 서럽다더니 이건가. 라고 느꼈다. 그리고 덤으로 결혼은 꼭 해야겠구나, 나이가 40인데 이러고 있으면 정말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도 남겠다, 뭐 이런식의 생각도 해 줬다. (엄마 나 착해? 잘 세뇌된 딸..)
4.
S느님에게 보고했더니 30시간만에 나타나셔서 따땃한 저녁을 멕여주시고, 약을 하사하셨다. "약 먹어야지 우리 리라, 우쭈쭈" 하시며. 낼름 받아먹고 행복해 했다. 아가들은 왜 약을 싫어할까. 이렇게 좋은 것을. 어쨌든 3일만의 식사는 약발을 받아 무사히 넘어갔다. 지금 시각 새벽 3시인데, 매슥거리지 않으니까. 올레~
5.
그런데 왜! 이렇게 아팠는데 왜! 하나도 안 수척해진것인가. S느님은 나를 보자마자 한 마디 하셨다. "어후 쾡해~"
그렇다. 나는 쾡해지는 아이이지 수척해지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파서 살이 빠지는 것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특권은 아니구나. 갑자기 예전에 B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울고불다가 우리집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삐쩍마른 모습으로 나를 깜짝 놀래켰던 게 생각났다. 델리케이트 B는 시집가서 잘 살고 있얼 거라 믿는다.
나도 나대로, 잘 살고 있으니, 3일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도 살은 눈꼽만큼도 안 빠진채로...;; (다이어트는 어려운 것)
6.
겨우 살아나 "나의 두 남자=D&K"에게 아프다고 징징 거리는 톡을 했더니 대뜸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 안봐서 아픈건데?"
"ㅠㅠ 애정이 느껴지는 초감동 코멘트"라고 하기에 몇 시간뒤의 화상채팅 내용은 이런거였다. "하나도 안 수척한데~ 가만있어봐 턱선이 살아나는거 같아~ 스무살때 턱선? 누나, 일부러 조명 좋은데 있죠? 창백해 보일려고?" 그리고는 Mac에서 제공하는 각종 사진 효과에 신나서 지들끼리 난리였지 -_-;;; 어후... 남자는 열살이든 스무살이든 서른이든 똑같은거 같어... 그래도 이 두남자는 듬직하게, 얼른 낫고 학교오라고 해준다.
7.
침대에서 3일간 상주하니 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뿐이다. 내 블로그 글들을 보는데 재미가 없다. 최근에 쓰다만 글은 더 재미없다. 좀전에 K와 J는 유머감각 좀 길렀음 좋겠네, 나도 재미없지만 J는 더 재미없네, 같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내 비천한 글들이 얼굴을 들지 못함을 느낀다. 어쩌겠어.. 그것도 능력인데, 나이가 들 수록 진심으로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갑자기 H오빠와 부산사나이. 페요.밤. 빡. 재희아빠 등등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감사의 말을 전하려다가 또 무슨 리플이 달릴까 무서워 관둔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 그치만 그들은 요새 지들끼리 논다. 흥. 왕 삐져서, 다음에 부르면 총알같이 나가줄테다. 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낫고..
8.
그 날 가위바위보하면서 물어볼 껄 그랬다라고 노오란 쓸개즙을 토해내면서 생각했다.
만약 우리 이게 마지막으로 보고,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거라면, 그럼 지금 나에게 무슨 말 할 꺼냐고.
9.
그렇지만 마치 아프지 않았다는 듯, 새 아침이 올테고, 내게 지난 3일이 없어진 것 빼고는 지구는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계속 돌아가겠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계속 도는데 왜케 추운거냐고 --;) 쓸개즙이 입으로 나오면서 내게 주었던 궁금증도 사라지고, 내 몸안에 이런게 있었구나 싶던 것들은 비닐봉지에 실려 나가고, 다음 주 월요일의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부모님이 오시면, 그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런 날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것 같아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에 하나는 "아빠 책상 뒤지기".
왠지 가끔 아빠 책상을 뒤지고 싶은 날이 있다. 아빠는 너무나 느리고, 당당해서, 마치 개인적인 비밀 같은 것은 없는 것 같은데다가,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가장 먼저 눈물이 그렁그렁해짐에도 불구하고, 도대체 감상적인 말은 하지 않으니까, 가끔 뭔가 숨겨놓은 비밀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럴 때면 항상 아빠 책상을 뒤적거려보지만 실로 얻어지는 것은 별로 없다. 사실 아빠조차도 잘 사용하지 않는 아빠 책상이니까. 내가 한 번 앉아서 들척거림으로서 먼지들만 제 자리를 잃을 뿐이다.
우리 아버지 책상은 오빠가 중학교 때 쓰던 것을 (우리 오빠는 고등학교가 기숙학교였어서 고등학교때 저 책상은 그냥 장식용 가구 였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치워버리는 바람에 아버지가 서재에 옮겨놓은, 당시 폭풍적인 인기를 자랑하던 "뱅가구" 책상이다. 아빠가 책상에 앉아 공부할 일은 별로 없으니까, 그리고 우리 아빠는 너무나 외로움쟁이라서 방에 틀어박히는 일은 거의 없고 주로 거실에 상주하시거나 내 방이나 안 방에서 나랑 놀거나 엄마랑 노니까, 그 책상에는 주로 멀티탭들, 세금 고지서, 집문서 (-_-;), 여권 및 각종 서류들이 정리되어있다.
그렇지만 그런, 아주 재미없는 것들에 묻혀 모르던 것들이 가끔 눈에 띌 때가 있는 거라. 오늘은 쌓여있는 증명사진들, 그러니까 정사각형 7바이 7 봉투에 들어있어, 쓰고 남은 증명 사진들 봉투들이 한무더기 쌓여 있길래 꺼내봤다.
처음은 당연 아버지가 최근에 여권사진 찍으신거,그 다음은 당연 어머니가 여권사진 찍으신거 (두분이 같이 가서 발급 받으셨고 언제나 서류챙기기는 아빠 몫이니까)
그리고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리고 그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리고 그 다음 봉투는 엄마가 그 그 그 전에 여권사진 찍으신거.
그렇게 엄마가 20대에, 처음 결혼해서 여권사진 찍으신거 까지 가지고 계시더라.
흑백 사진속에 엄마는 정말 70년대 같은 스웨터를 입고 화장기 없는 얼굴이 너무 앳된, 지금 나보다 더 어린 모습이었다.
뭔가, 너무 감격스럽고도 비밀스런 장면이라 나는 얼른 그 사진들을 착착 넣어서 고 자리에 그대로 모셔놨다.
그리고 1시간쯤 있다가 엄마가 성당에서 돌아오신 걸 보고 나는 참지 못하고 쪼로록 달려나가, 모년의 은밀한 식사시간에 그 사진을 공개했다. 그랬더니 엄마는 평소처럼 깔깔깔 웃지 않고, 엄청 환하게 미소지으면서 한참 사진을 쳐다보다 얼굴을 붉히며 말하신다.
"이게 언제더라…"
아무래도 우리 아빠처럼 다정다감하고 아기자기한 남자면 좋겠는데, 결국에는 수많은 내 친구들이 주장하듯, 나는 father 컴플렉스를 뛰어넘지 않으면 결혼할 수 없는 녀자 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미 나도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아빠 같이, "자상하고 잘생기고 똑똑한"(우리 엄마가 언제나 나에게 자랑하는 수식어, "내남편처럼 잘생기고 똑똑하고 자상한 남자는 없다.") 남자는 없다는 것.
그리고 아빠도 젊었을 때는 전혀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 아빠는 7년만에 생긴 아기인 우리 오빠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 회가 먹고 싶다니까 만원짜리를 주며 "사다먹어"라고 말해서 33년뒤인 오늘날까지 구박당하고 있고, 9년만에 생긴 아이인 내가 태어날 때에는 스위스에 가는 바람에 엄마 곁에 없어서 31년뒤인 오늘날까지 그 이야기가 나오면 엄마는 분노폭발 직전까지 가신다. 이 두 이야기야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농담거리가 될 수 있겠지만... 아.. 그 이상은 ㅠㅠ.. 어쨌든 그는 대약자.)
이야기로 쓰면 마치 너무나 완벽한 남편같지만, 우리집은 실로 엉망인 집안이고, 부모님이 아침마다 툭탁 거리는 소리로 나는 잠에서 깨서 "이제 그만 싸우자." 라고 말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아름다운 이야기'가 써지는 것은, 결국 별것 아니게 평범한 우리 세사람이 서로를 아끼고 있고, 아주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면서 살아가고 있어서가 아닐까. 그리고 나는 가끔 그 모든 것을 글로 남기고 싶은데, 그 것은 내 미술적 재능이나 음악적 재능이 "기록"의 수준에 이르기에는 너무 미천해서 일 뿐이다. 조상님이 "글"이라는 걸 발명해줘서 감사할 따름.
그러니까, 문득 나도 계획적인 글보다는, 의식의 흐름에 충실한 글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아보고 싶어서 한 번 써봤다. 블로그에 또 거미줄 치게 생겼으니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일은 아빠 책상 뒤지기가 아니라, 글로 남기기라고 덧붙이고 싶다. 당신들이 보지 않는다면 당신들에 대한 글도 쓸 수 있는데! :3
1. 그러니까 말이다. 살다보면 누군가에게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 다른 이에게는 별거 아닐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엄청나게 하고 싶은" 일이 어떤 이에게는 하기 싫은 일일 수 있다. 욕구가 교육되는 거라고 하더라도 취향은 천성일 수 있으니까.
2. 그래서 우리는 "맞는 성격"도 찾기 힘들고 "비슷한 취향"도 찾기 힘들고, 그렇다고 취향이 비슷해서 친해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친하다고 취미가 비슷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만 다행이도 취향이 꼭 비슷해야 친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아무튼 그러니까, 가끔 내가 어처구니 없는 데에 가겠다고 했을 때, "어! 나도 가고 싶어"라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그 반가움이나 기쁨, 혹은 동질감, 편안함 같은 것은 무언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라. (또 내가 어처구니 없는 것에 호불호를 선언할 때, 아주 매니아틱한 작가를 입에 올렸을 때, 매우 인기없는 밴드의 노래를 흥얼거렸을 때 등등)
그래서 그 날, 그러니까 작년 5월의 어느날에, 내가 "Joshua tree national park 가보고 싶은데..."했을 때 그 옆에 한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나는 엄청 신이 났고, 유미가 돌아와서 "우리 가자!"했을 때 "그래 가자!" 해주었을 때 그 기쁨! 그 설렘!
3. 그래서 나는, Joshua tree를 보기 전이므로 오늘은 U2의 노래를 좀 들어줘야한다는 명목하에 youtube놀이를 시작했고, 어, 그래, Entourage의 그 "녀석들"이 생각나니까 맥주도 좀 마셔줘야할 것 같고, 맥주를 마셨으니 태평양 바닷가를 한바탕 뛰어다녀줘야 할 것도 같고, 내가 구지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게 아니어도 그 피어오르는 사막의 연기속에서 무언가 특별한 변화가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분도 좀 들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나와 다를 것 같고, 가는 길도 알아두어야할 것 같고, 그랬단 말이다.
<어찌되었든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Joshua Tree가 정말 Master piece라는 것. 보노는 죽을 때 흐뭇하리..>
4.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Joshua Tree National Park에 못갔다. 왜냐면 우리에겐 너무나 많은 밀린 수다가 있었는데, 그래서 퀸사이즈 침대에 셋이 누워 꿈쩍도 안하고 말만해대다가 머리 맡 블라인드에서 새어드는 새벽햇살을 맞으며 잠이 들었고, 심지어 난 끝까지 이불을 돌돌 말고 "헝~ 더 자게 해줘 ㅠㅠ"를 외치다가 끌려나왔다. (사실 어딜가나 나는 이 모냥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날 누가 5시간 운전을 할 것인가, 어떤 루트로 LA까지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던 전날 밤을 농담삼아 마르가리따를 마셔줬다. 다음에 꼭 가자!, 다음에는 꼭 가줘야해! 를 덧붙여 가면서.
5. 그래서 내가 Joshua Tree National Park에 가보고 싶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아버지가 "난 봤는데"라고 말해서 난 한 번 좌절했고 어머니가 옆에서 "난 못 봤어"했을 때 더 깊이 좌절했다. (어머니랑 아버지랑 같이 가셨는데 어머니는 기억도 못했던 것. 그래서 아버지가 무슨 소리, 당신이 구지 내려서 보겠다고 해서 우리가 사막 한가운데서 차도 세우고...로 시작하는 툭탁툭탁을 또 시작하셨지;; ) 그리고 잠시 소강 상태가 되었을 때서야 비로소 어머니는 그런데 그게 왜 보고싶냐고, 그냥 나무 던데;; 라고 말씀하셨고, 그제서야 나는 발언권을 얻어,
그러니까,
모르몬 교도들이 자신들의 신앙 때문에 동부에서 쫓겨났고, 사막으로 밀리던 도중에 여호수아를 닮은 나무를 만나 이름을 여호수아 나무라고 붙여줬고, 그게 바로 미국식으로 읽으면 Joshua Tree인거고, 자신의 믿음에 대한 신이 주시는 시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이 함께한다는 믿음의 증표를 상징하는 거고, 그 동네에서만 살고, U2가 바로 그 Joshua Tree National Park 공원내에 머무르면서 Joshua Tree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든거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U2가 누군지부터 설명해야했던 거다.
6. 살다보면, 간절히 바랬는데 내 것이 아닌 것도 있고, 또 뜻하지 않게 내 것이 된 것들도 있고, 또 이보다 더 잘 맞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헤어진 사람도 있고, 밍숭 맹숭하게 계속되는 인연도 있다. 짧게 말하자면, 그다지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는 게 인생인 것 같다. 그렇지만 내 능력 밖의 결정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매달리게 되고, 안달하게 되고, 조바심 치게 되고, 결과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았으면서도 막상 현실이 되면 신경질 내게 되고, 심장이 찢어질 듯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생각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인 나"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봐야 아는 내일이 있다는 것에 조금 기분이 설렌다. 현실에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꿈꾸고, 안 이루어질 것을 알아도 바라고, 우연을 만나 웃고, 숙명이 덮쳐와서 눈물 흘리는 것, 그게 그냥 사는 것 아닐까.
7. 어찌 되었든 나는 아직도 Joshua Tree를 본 적이 없고, 이제 유진이는 멜버른으로 떠나고, 유미는 가을에 태어날 자신의 아기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죠슈아 트리 국립공원에 살아서 가게 되는 거 맞을까? 그렇다면 언젠가 그곳에 두 발을 디딜 때, 나도 깨달음을 얻거나, Master piece를 남기거나, 그 둘다 아니라면 깔.깔.깔. 함께 웃고 떠들 수 있는 누군가와 함께 일까? (궁금하니 계속 살아보는 수 밖에!)
8. 모래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게 만드는 열기가 연상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아마도 내게는 그게 <어리석은 간절함>인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것을 알아도 바라는 마음, 그게 20대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 생각마저 20대의 어리석음인지 나는 서른이 되어가고 있지만 여전하고, 이 여전함이 도대체 언제 변할 것인지 모르겠다. (게다가 또 내 주변에는 영원히 변하지 않고 20대일 것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9. 그렇지만 무식한 방법으로 나아가는 게 어쩌면 가장 나 답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 그리고 누구나 가장 자신다운 모습으로 있을 때 "반짝 반짝" 빛나는 것 아닐까. 조바심 내지 말고, 계획은 없지만 꿈 꿔야겠다. 여러 장소들. 여러 모습들. 그 안에 좁쌀 같이 쪼매난 나.
과천에 다녀왔다. 내 기억 속의 그 것과는 다르게 도시는 이미 시간을 잔뜩 머금어 군데군데 낡고 촌스러운 모습이 눈에 띄기도 했다.
성당을 따라 관악산으로 올라가는 인적 없는 길에는 초여름의 푸르름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어릴 때는 이 길이 이유없이 무서웠었다. 그 생각이 나자 웃음이 난다. 과천 초등학교을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내 할머니와 함께 걷던 그 산책로가 예전과 같이 들장미들로 뒤덮여 있었고 나는 이제 곧 조그마한 다리가 나올거야,라고 속삭인다. 두근대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 작은 다리를 건너면 내 어린 시절이 살고 있는 동네에 도착하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과천은 5층짜리 낮은 아파트들과 넓게 펼쳐진 잔디밭. 집 뒤에 있었던 놀이터. 동네 슈퍼 봄이면 덤으로 병아리도 팔았던 뽑기장수 아줌마. 그렇게 뒤죽박죽 잡동사니를 잔뜩 끌어담아 놓은 어린 시절의 보물 상자 같다. 모두들 하나씩 가지고 있지만 지금 물어보면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생각보다 작은 아파트 앞 잔디밭이 바라보이는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오빠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에는 혼자 나와 이렇게 그네를 탔었다. 신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혼자서 뭔가 잘 할 수 있다고 증명 해 보이려 했던 인생의 첫 시도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혼자라는 것이 너무 두려워서 꼭 할머니가 가끔 바라볼 수 있게 우리집 베란다에서 보이는 이 자리에 앉았고 그런 내 마음을 안다는 듯 그녀는 한 시간이 채 안되서 한 번, 다시 또 한 번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어 주고는 했다.
그런데 지금 이 홀로 있음은 내게 얼마나 마음 편함을 선사하는지. 하지만 그게 옛 기억에 젖으니 왜 이리 쓸쓸함을 불러 일으키는지. 혼자 잘 있을 수 있게 되어 할머니가 돌아가시게 된 걸까라는 철 없는 생각이 들어버린다.
잠자리가 날기 시작하면 저 잔디밭을 하루 종일 뛰어다녔다. 너무 많이 잡아서 채집통에서 서로 엉켜 죽어버리던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나와 내 형제는 본성에 잔인함이 숨어있을 지도 모르지만, 그 시절에는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그 작은 생명체들을 쫓아 뛰어야 할 것 같았다.
우리는 잡은 잠자리들을 방에서 풀어주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 어머니와 할머니는 엄청난 자상함이나 이해심의 소유자일지고 모르겠다. 그래서 집안 대청소를 할때마다 전등 갓 안에서는 엄청난 잠자리 시체들이 나오고는 했고 그럼 나는 메스꺼움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악몽에 시달리면서도 밤새 뒤척이다 결국 할머니 품에 기어들어가고는 했다.
굳이 잠자리의 계절이 아니더라도 1년 내내 나는 저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돌이켜 보면 그게 내 직업이었던 듯하다. 겨울이면 눈사람을 만들어야 했으니까. 봄에는 봄이니까 여름에는 더우니까. 그 시절의 나는 무엇을 바라보며 그렇게 내 달렸던 걸까. 문득 궁금해 진다. 그러다 지치면 할머니등에 엎혀 집에 오면 되었고 동네 남자애들이 괴롭히면 펑펑 울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울고있으면 싸움이라고는 태어나서 해 본 적이 없는 오빠가 그 녀석들, 내가 때려줄께라고 큰 소리를 쳐 주고는 했다. 그는 그게 나를 웃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마 절대 만났어도 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치 땅의 모래를 부드럽게 걷어내어 그 안에 파묻혀 있던 무언가를 꺼내려는 것 처럼 그네가 앞 뒤로 까딱 거릴 때마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살아난다. 나는 그 시절, 그 기억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온 걸까. 서울로 이사를 갔지만 그다지 먼 곳은 아니었고 큰 집이 과천초입에 있어 명절마다 근처까지 왔지만 이곳에 제대로 온 것은 이십년을 훌쩍 넘긴 뒤다.
물론 그 이 십년간 나는 너무나 커버렸고 어쩌면 그 꼬마 아가씨로부터는 상상조차 못할 사람으로 변해 있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고 중요치 않은 사건들도 있었다. 소중한 인연들이 생겼고 어떤 것들은 아직도 손에 꼭 쥐고 있고 어떤 것들은 스쳐지나가게 놔 뒀다.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믿음을 잃어 이제 죽는게 아닐까라고 생각하며 아파한 적도 있었고 고통의 순간에 모르는 사람, 소설의 주인공, 노래 가사에 구원 받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밟아야만 하는 삶의 계단 한 칸이라고 믿으면서 왜 해야되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흘려버렸는지.
무엇을 그렇게 쫓아갔던 것인지 모르겠다. 표적을 놓친 후 생각해보니 목적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이 길을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뛰어야 할까.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든 것은 이제 어린 시절처럼, 울어도 아무도 찾으러 와 주지 않고, 금새 마음에 드는 다른 무엇인가를 찾을 수 있지도 않아서 인 것 같다.
오월의 따사로운 햇살과 옛추억에 젖어보지만 해가 뉘었뉘었지면 내가 돌아갈 곳은 더 이상 저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내 할머니는 더 이상 만날 수 없고 오빠는 한 집안의 가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 그네는 더 이상 내 몸에 맞지 앉는다. 모래를 밟는 신발 자국의 거대함이 나를 홀로 있을 수 있게하고 따뜻한 기억들이 미래로 나아가게 해 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오직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여전히 살아갈 내일이 있다는 것과 엄청나게 뜨거운 여름이 올 것을 예고하는 5월의 바람, 그 뿐이다.
예전에, 학교에서 어쩌다가 철근에 손등이 긁혀서 피가 철철 났던 적이 있다. 2cm가 조금 넘으려나? 가운데 손가락을 타고 세로로 0.3cm쯤 푹 파인 상처.
본인은 기억도 못 할거라고 생각하고, 기억한데도 이 글을 보지 못할 테지만, 아무튼 그 때 그 녀석에게 다쳤다고 징징 대자, 손을 잡아쥐고는 채 어린 딱지가 앉을랑 말랑한 상처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리면서
"흉 지지는 않겠다."
라고 조용히 말했었다.
딱지가 떨어지고 사실 직후에는 흉터가 남아서, 꽤나 보기 흉했었는데 어느 순간 점점 옅어져서 6개월쯤? 혹은 그 보다 더 오랜 시간이 지나서, 이미 우리가 헤어져버린 이후에 어느 순간 그 흉터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그 흉이 사라져버린 것은 완전하게 그 녀석의 덕분이라고 믿고 있다.
예전에 현정이가, 사람은 모든 것을 잊어버려도, 상처 받은 것은 잊지 않는다고, 상처 준 사람을 잊을 수 없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마찬가지로, 상처를 치유해 준 사람도 잊을 수 없을 거라고, 그 보다 10년이 지나서야 생각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잘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사건들이 나를 휩쓸고 지나갔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나는 삐뚤어지고 싶었고, 혹은 그 보다 더 정확히는 "아무 것도 필요없다"고 생각했었다. 가진 모든 것은 잃어버리거나 빼앗길 수 있고, 믿었던 사람은 배신할 수 있으며, 신뢰와 사랑의 언어들은 모두 거짓이 될 수 있다고.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나 자신도, 분명 견딜 수 없을 만큼, 더 이상 갈 곳이 없이 궁지에 몰리면, 제 멋대로인 행동을 하고, 누군가에게 거침없이 상처주는 사람이라고. 10년을 더 살든 20년을 더 살든 혹은 지금 죽어버리든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믿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그 때의 모든 기억들을 잊거나, 모든 시련을 극복했느냐라고 묻는다면 물론 아직이겠지만, 그래도 "내가 틀렸었어"라고 말 할 수 있는 건, 그 다음에 만난 사람들 모두가, 진심으로 대해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이렇게 나쁜 나를 좋아해 주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분명 살면서,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많은 실패를 했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을 꺼야.라는 것을 배웠다랄까.
그리고 그런 와중에서도 분명 그 사람은 나를 특별하게, 나도 그 사람을 특별하게 생각했으니까, 나는 그 사람에게 한가득 빚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잔뜩 곤두서서 타인에게 상처줄 준비만 완벽했던 나였는데, 그래도 지금 웃으면서 "그래도 사람을 좋아하는 쪽이 더 나은 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건 꽤나 그 아이 덕분이라고 생각하니까.
사랑의 감정이 지나간 후의 두 사람은 서로를 다른 모습으로 기억한다. 같은 추억은 두 가지 앵글로 찍혔고 두 필름은 전혀 다른 영화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상대에게 존중 받았다는 느낌을 가진 사람은 상대를 아름답게 기억한다.
분명 나는 그 아이에게서 존중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이겠지. 어쩌면, 단지 헤어진 이후에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나는 존중 받았다고 느끼는 지도 모른다. 헤어진 연인은, 결국 여지까지만큼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 관계이고, 비참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내가 너를, 니가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아니라, 더 이상 나는, 더 이상 너는, 서로에게 특별하게 대우 받지 못한다는 사실부터 온다. 서로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지만, 순식간에 많은 평범한 사람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스스로를 확인할 때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아이에게 정말 고맙다. "제발 이 기억은 아름답게 간직하게 놔둬 주세요. 저한테는 소중해요." 라고 외치는 가엾은 나를 인정해줘서.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고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면
그건 분명 비참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니까.
(사랑에 자존심을 내세우면 안된다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랑만큼 자존심을 세워야 하는 일도 없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상대와의 관계는 결코 좋은 관계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와"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사랑하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러니까,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오랜 기억속의 그 사람을, 그 사람과의 추억을 사랑한다는 말이겠지만, 나에겐 먼지가 끼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는 의미도 있다. 그 사진이 헤어진 뒤에도 계속 책상 위에 놓여져 있어, 365일 그리고 더 긴 시간을 반짝반짝 하게 빛을 발했다면, 분명 어디 쯤에서 나는 지쳐버렸을 테고, 더 이상 나를 존중해주지 않는 상대에게 화가 났을 테고, 그를 미워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미워했을 것이다.
글쎄? 다시 연애할 수 있을까?
글쎄? 이런 식이라면 정말 아무나랑이나 만나서 결혼해서 그렇게 평범하고 지루하게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글쎄? 평생 혼자 살 거라고 애기신님이 점지하셔도 별로 끔찍하지 않을 것 같네?
라고 생각하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말이다.
먼지 낀 너를 사랑한다.
먼지 낀 니가 보고프다.
무슨 일이 계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 미니홈피의 게시판을 열어서 캐캐묵은 글들을 봤다. 시작하기도 전에 쪽팔리는 일이라 내게 이런 일은 잘 벌어지지 않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남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그런데, 나는 늘 예전에 내가 쓴 글이 훨씬 잘 쓴거 같다. 내 감수성은 죽어가고 있고, 문장력은 떨어지며, 소재를 잡아내는 능력도 줄어들고 있다. 흑 ㅠㅠ 슬프다.
몇 개의 마음에 드는 글이 있었으니 나중에 시간나면 가져다 놔야겠다. 일단은 미니홈피로 링크를 걸어둠.
1. 자꾸 칫솔을 사대다보니 엄밀히 나 혼자 쓰는 화장실인데 칫솔은 4~5개가 꽃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으로 조금 뻣뻣한 칫솔모가 좋기 때문에 미세모 칫솔 같은 것은 금세 장식용이 되어버기 일수다. 이를 세게 닦는 버릇이 있어 뻣뻣한게 맞는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다. 그저 조금 뻣뻣한 솔이 이빨에 닿을 때야 비로소 "닦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 뿐이다.
2. 어머니는 자기 주변에 비데를 싫어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결국 하나를 사셨지만-그게 벌써 10년전-나는 도대체-지난 10년간-비데에는 적응을 못하겠다. 심지어 술에 잔뜩 취해서 제정신이 아닌 순간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그 살결에 닿는 뜨뜻한 온도조차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도 우리집 비데야 그렇다 쳐, 백화점 여자화장실에 멋들어지게 설치되어 있는 비데칸은... 아, 세상이 진보하여 나에게 미치는 "나쁜"점도 생기는 것이다.
3. 주로 연초나 연말에, 누군가가 읽은 책 목록을 포스팅하면, 내가 몰랐던, 그러나 재미있어보이는 녀석이 어디 없나 들여다 보게 된다. "H랑은 정말 한 두권 겹칠까 말까야"라고 내가 말하자 C가 이야기했었다. 독서목록처럼 누군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없다고. "취향에 맞지 않으면 보지 않게 되잖아. 지극히 주관적인 성향이 보이는 리스트라고 생각해. 그거야 말로."
4. 예전에 SS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 내리는 바를 어떻게 누르느냐(발로 밟느냐, 손으로 누르느냐)는 이야기를 꺼낸 적이 있다. 특히 변기 뒤쪽에 설치 되어 있는 한 뼘안되는 바모양의 것일 경우.(이거 남자들은 이해 못할 이야기일까)
물론 그녀가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였지만, 나는 그 순간 17년간 친구였어도 "절대 절대 절대" 모를 만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거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아마 결혼을 해서 같이살 게 되도, 배우자가 공중 화장실에서 물내리는 바를 발로 밟을 지 손으로 누를 지는 모르겠지. 지극히, 지극히, 개인적인 리스트들이 있다. 은밀하려 의도하지 않았지만, 비밀스럽기 그지 없는. 그 밖에 화장실에서 하는 것들 같은 것들.
5. L은 요즘 K를 보는 재미에 산단다. 주말이라 못봐서 어쩌냐는 나의 말에 L이 대답했다. "언니 원래도 열람실에 잘 안와요 ㅠㅠ"
L이 귀여웠던 건, 아직 "짝사랑을 하는" 나이여서 일 수도 있고, 그 보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K가 나타날까 기대하며 열람실에 -4시간째-앉아 있을 모습이 그려져서 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K는 지금 이 상황을 상상도 못하고 있을 테다. 언제나 짝사랑이 "상큼"한 이유는 그 비밀스러움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6. 아이를 좋아하게 된 것은 그 아이가 망설였기 때문이다. 내가 무릎을 꿇고 팔을 벌리며 아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아이는 살짝 "가도 될까" 망설였다. 그렇지만 그 찰나를 지나 아이는 내게 아장아장 걸어와 목을 폭 끌어앉았다. 순수하게 "당신이 좋아"라는 마음이 와 닿던 순간, 세상에 단 한사람 나만이 기억하는 그 찰나에 나는 아이를 좋아하게 됐다.
사랑에 빠지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나와 취향이 맞는지, 이야기가 잘 통하는지, 가치관이 비슷한지, 내가 꿈꾸는 모습을 가진 이인지, 같은 것들은 그저 기름에 불과하다. 언제나 가장 중요한 것은 어느 순간 스파클이 튀는 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99%의 이성을 만나도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1%의 이성을 만나서도 생을 바쳐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순간을 기억한다. 그가 웃었던 그 순간, 그가 나를 바라보던 눈빛, 그의 몸짓, 내가 사랑에 빠졌던, 비밀스러운 이유들을.
7. 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 중에서도 분명 내가 까맣게 모르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해주는 마음,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는 것, 누군가 나의 행동들을 보고 나를 어떠한 사람으로 판단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온전히 나에게 닿지 않기에 사람은 늘 외롭고, 누군가가 나를 기억할지 아닐지 모르기에 망설인다. 타인의 사고관을 알지 못해서 오해를 사고, 타인을 알지 못하기에 스쳐지나보낸다.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알수 없는 나의 은밀한 리스트들을 떠올려본다. 그렇게 조금 설레어하면서 나는 기다리고 있다. 가장 더디게, 이제는 오긴 오는건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는 봄, 그 녀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