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전에 13이 그랬었더랬다. 내 머리속 지우개 같은 건 다 개뻥이야, 아프면 개인 위생이 떨어져서 예쁠 수 없다고. 아무리 걔가 손예진이어도 냄새나는 손예진이라니까.라고.

개인위생이 떨어진 우리집은 난장판이 되었다.(집에 나 뿐이니까)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는 그렇다치더라도, 오늘 새벽 내가 내다 버린 음식물쓰레기를 가장한 비닐봉투만 3개. 무슨 귤이 9개 든 주제에 8000원을 하냐며 투덜거리며 산 귤 중 2개는 뜨끈뜨끈한 방바닥에서 딩굴다 이미 물러져 있었는데, 그제서야 걔가 귤이 아니라 천혜향임을 알았다. 그래도 같이 사 온 우유는 제 시간에 냉장고에 넣어서 다행이다. 일어날 수 있고 몸을 움직일 수 있어진 것에 감사하면서 집을 치운다. 개인 위생이 양호한 세계로~!!

2. 
쌓인 설겆이를 하기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뜨거운 물을 틀었는데, 물이 너무 뜨거워서 찬공기와 맞닿아 손목과 팔꿈치 사이의 어딘가에쯤 장마전선이 형성되면서 습기가 몰아쳐 깜짝 놀라 팔을 확 잡아 뺄때까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설겆이에 집중하고 있었다. 먹을 때는 이따 금새 설겆이 할 거니까~ 라고 생각했던 간짬뽕을 볶은 냄비에 부어놓았던 따뜻한 물은 이미 냉수가 되다 못해 빙수가 되려하고 있었고,미리 떼어내지 않은 간짬뽕의 흔적들은 냉혹하게 냄비에 엉겨 붙어있었다. 그래, 맛있는 것은  흔적을 남기지, 흔적을 남기는 것은 지우기 어렵고, 인생이 다 그렇지, 먹을 때나 좋았지. 따위의 감상을 쏟아내며 빡빡, 수세미질을 했다.

3.
실은 거나하게 독한 술을 들이부은 날이 아닌 이상 먹은 것을 게워내는데는 별로 취미가 없는데, 아마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단순히 아파서 약 1.5m떨어져서 반대로 열리는 내 방문과 화장실문 1초만에 열기 신공을 보이며 침대위에서 화장실까지 날아가는 잽싼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막판에는 침대 옆에 비닐봉지를 걸어두는 준비성을 보였지.
다음날 아침에 내가 먹을 죽을 내가 쑤면서, 한 손으로는 내 배를, 한손으로는 가스레인지를 부둥켜안고, 혼자 사는데 아프면 서럽다더니 이건가. 라고 느꼈다. 그리고 덤으로 결혼은 꼭 해야겠구나, 나이가 40인데 이러고 있으면 정말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도 남겠다, 뭐 이런식의 생각도 해 줬다. (엄마 나 착해? 잘 세뇌된 딸..)

4.
S느님에게 보고했더니 30시간만에 나타나셔서 따땃한 저녁을 멕여주시고, 약을 하사하셨다. "약 먹어야지 우리 리라, 우쭈쭈" 하시며. 낼름 받아먹고 행복해 했다. 아가들은 왜 약을 싫어할까. 이렇게 좋은 것을. 어쨌든 3일만의 식사는 약발을 받아 무사히 넘어갔다. 지금 시각 새벽 3시인데, 매슥거리지 않으니까. 올레~

5.
그런데 왜! 이렇게 아팠는데 왜! 하나도 안 수척해진것인가. S느님은 나를 보자마자 한 마디 하셨다. "어후 쾡해~" 
그렇다. 나는 쾡해지는 아이이지 수척해지는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파서 살이 빠지는 것도 누구에게나 주어진 특권은 아니구나. 갑자기 예전에 B가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3일간 식음을 전폐하며 울고불다가 우리집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삐쩍마른 모습으로 나를 깜짝 놀래켰던 게 생각났다. 델리케이트 B는 시집가서 잘 살고 있얼 거라 믿는다. 
나도 나대로, 잘 살고 있으니, 3일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도 살은 눈꼽만큼도 안 빠진채로...;; (다이어트는 어려운 것)

6.
겨우 살아나 "나의 두 남자=D&K"에게 아프다고 징징 거리는 톡을 했더니 대뜸 대답이 돌아온다.
"우리 안봐서 아픈건데?"
"ㅠㅠ 애정이 느껴지는 초감동 코멘트"라고 하기에 몇 시간뒤의 화상채팅 내용은 이런거였다. "하나도 안 수척한데~ 가만있어봐 턱선이 살아나는거 같아~ 스무살때 턱선? 누나, 일부러 조명 좋은데 있죠? 창백해 보일려고?" 그리고는 Mac에서 제공하는 각종 사진 효과에 신나서 지들끼리 난리였지 -_-;;; 어후... 남자는 열살이든 스무살이든 서른이든 똑같은거 같어... 그래도 이 두남자는 듬직하게, 얼른 낫고 학교오라고 해준다. 

7.
침대에서 3일간 상주하니 할 수 있는 것은 인터넷 뿐이다. 내 블로그 글들을 보는데 재미가 없다. 최근에 쓰다만 글은 더 재미없다. 좀전에 K와 J는 유머감각 좀 길렀음 좋겠네, 나도 재미없지만 J는 더 재미없네, 같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내 비천한 글들이 얼굴을 들지 못함을 느낀다. 어쩌겠어.. 그것도 능력인데, 나이가 들 수록 진심으로 깔깔깔 웃을 수 있는 일이 중요하다고 느낀다. 갑자기 H오빠와 부산사나이. 페요.밤. 빡. 재희아빠 등등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감사의 말을 전하려다가 또 무슨 리플이 달릴까 무서워 관둔다. 사람들이 보고 싶다. 그치만 그들은 요새 지들끼리 논다. 흥. 왕 삐져서, 다음에 부르면 총알같이 나가줄테다. 라고 생각한다. 일단은 낫고..

8. 
그 날 가위바위보하면서 물어볼 껄 그랬다라고 노오란 쓸개즙을 토해내면서 생각했다.
만약 우리 이게 마지막으로 보고, 마지막으로 대화하는 거라면, 그럼 지금 나에게 무슨 말 할 꺼냐고.

9.
그렇지만 마치 아프지 않았다는 듯, 새 아침이 올테고, 내게 지난 3일이 없어진 것 빼고는 지구는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계속 돌아가겠지.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계속 도는데 왜케 추운거냐고 --;) 쓸개즙이 입으로 나오면서 내게 주었던 궁금증도 사라지고, 내 몸안에 이런게 있었구나 싶던 것들은 비닐봉지에 실려 나가고, 다음 주 월요일의 프리젠테이션이 끝나고, 부모님이 오시면, 그럼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것처럼, 이런 날이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될 것 같아서...

10.
기록한다.
서른 둘이 되도 철없는 나.
서른 둘이 됬지만 아무 것도 아닌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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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aeons